신약 개발은 ‘빅파마(Big Pharma)’라 불리는 서구 거대 제약기업들의 전유물이었다. 신약 개발에는 10~15년이 걸리고 1조원이 넘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화이자·머크 같은 대형 제약사가 주도한 코로나 백신·치료제 개발 시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근 인공지능(AI)으로 무장한 신약 기업들이 이런 패러다임을 뒤흔들 강력한 도전자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에서도 삼성종합기술원 출신 AI 전문가 김진한(46) 대표가 이끄는 스탠다임이 AI 신약 개발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이 회사는 수많은 논문과 실험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 최적의 후보 물질을 찾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김 대표는 작년 하반기와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스탠다임 본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최고의 연구자도 특정 주제에 대해 논문을 10편 이상 검토하지 못하지만, 스탠다임의 AI는 시간당 400~600편 논문을 읽고 수만개의 후보 물질 가운데 최적을 가려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AI를 활용하면 돈과 기술력이 있는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뿐만 아니라 규모가 작은 바이오 벤처들도 손쉽고 빠르게 신약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년 걸리던 개발 기간 7개월로 단축
김 대표는 서울대 응용생물화학·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인공지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삼성종합기술원을 다니다가 동료들과 2015년 스탠다임을 창업했다. 임직원 75명 중 65명(86%)이 인공지능, 생물학·화학 분야 연구자들이다. 스탠다임은 AI 플랫폼과 약물 관련 특허를 7개 보유하고 있고, 출원을 진행하는 것도 38개나 된다. 2016년에는 글로벌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개최한 AI 신약 개발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스탠다임의 AI를 활용하면 신약 개발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 김 대표는 “신약 후보 물질을 찾는데 전통적인 제약사들의 개발 방식으로는 2년 정도 걸리지만 AI를 활용하면 7개월로 줄일 수 있다”며 “개발 비용은 10분의 1로 훨씬 크게 줄어든다”고 말했다.
스탠다임은 현재 SK케미칼과 HK이노엔, 한미약품를 포함한 국내 제약사 4곳과 손잡고 신약을 개발 중이다. 김 대표는 “(계약 조건에 따라)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유럽의 빅파마와도 신약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스탠다임은 자체적으로도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개발 중인 신약 후보 물질은 42개. 암부터 뇌질환, 대사질환까지 다양한 질병을 겨냥한 물질들이다. 김 대표는 “올해부터 기술 수출도 시작한다”며 “빠른 시일 안에 해외 AI 기업들처럼 큰 규모의 계약을 성사시켜 본격적으로 매출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코스닥 상장 목표
스탠다임은 연구개발을 위한 실탄도 두둑이 확보했다. 지난해 7월에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의 자회사 파빌리온캐피털로부터 1000만달러(약 112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국내 AI 신약 개발 회사가 해외 투자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SK㈜와 SK케미칼 등 SK그룹도 총 174억원을 투자했다. 이를 포함한 누적 투자 금액은 802억7500만원에 달한다.
스탠다임은 내년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 대표는 “다른 해외 경쟁사들과 비교해 기술적인 수준에서 차이가 없다”며 “지난해 제약 산업의 중심지인 미국과 유럽에 사무소를 설립한 만큼 해외 진출에도 더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