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과 화학제품 등을 시험하고 인증하는 A연구원은 의료기기 중국 수출을 위한 인허가 플랫폼과 체외충격파 치료 기기 개발 등을 위해 2019년에만 21억여 원의 정부 연구·개발(R&D) 지원을 받았다. A연구원은 2019년 체외충격파 치료기 관련 특허를 한국과 미국에서 받았지만, 한국 특허만 정부 R&D 성과 관리 시스템인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에 등록했다. B 정부출연연구기관도 5G 국가 표준 기술 개발을 위한 정부 R&D 과제로 매년 약 10억원의 연구비를 받아 2018년부터 4년간 5건의 국내 특허를 등록했지만 미국 특허는 누락했다. B 출연연 관계자는 “연구자가 여러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각 과제에 대한 성과 등록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정부 R&D 지원을 받아 등록한 해외 특허가 절반 이상 누락된 것으로 나타났다. 출연연과 기업 등의 관리 부실로 연구자들이 해외 특허 성과를 입력하지 않아 생긴 일이다. 해외 특허 성과가 누락될 경우 해외서 기술이전료가 발생해도 정부가 알 수 없고, 사적으로 특허를 빼돌릴 수 있는 등 R&D 성과 관리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이지원

◇해외 특허 ‘절반 이상’ 입력 누락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윤두현 의원실이 특허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정부 R&D로 진행된 미국 패밀리 특허 2107건 중 정부 R&D 성과 관리 시스템에 입력된 건은 972건(46.1%)으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 패밀리 특허는 한국에 특허를 신청한 뒤 1년 이내에 미국에 같은 특허를 신청하면 한국의 출원일로 인정해 주는 제도로 묶인 다. 먼저 출원한 특허에 우선권이 있기 때문에, 국제 특허 등록에서 흔히 쓰인다.

지난 2015년부터 정부 R&D 사업으로 진행된 해외 특허 입력 비율은 대부분 50% 대에 머물렀다. 특허청 관계자는 “해외 특허 등록 건수가 감소해 조사해 보니, NTIS 입력 비율이 절반도 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면서 “미국을 제외한 다른 해외 특허의 경우에는 어느 건이 누락됐는지 확인조차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실제로 정부 R&D로 진행된 사업에서 나온 국내 특허 등록 건수는 2021년 전년보다 2.4% 증가했지만, 해외 특허 등록 건수는 같은 기간 23.8% 줄었다. 코로나 유행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비정상적으로 등록 건수가 줄어든 것이다. 특허 성과를 가장 많이 누락한 곳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R&D 사업으로 2021년 미국 패밀리 특허 등록 건 중 553건을 누락하면서 입력 비율은 53.2%에 그쳤다. 이어 산업부 179건, 교육부 167건 순으로 미입력 건수가 많았다. 연구주체별 미입력 건수는 대학 462건, 공공연구기관 283건, 중소기업 208건 순이었다.

NTIS 통계를 관리하는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과제가 끝난 뒤에 해외 특허가 나오면 입력 자체를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연구자 윤리·기술료 납부 문제 우려

특허는 국가 예산이 투입된 R&D 사업이 제대로 진행됐는지 살펴볼 수 있는 핵심 지표이다. 하지만 연구 진행 상황 공유와 성과 입력은 전적으로 예산을 지원받은 연구자나 기관의 자율에 맡겨져 있다. 특허 성과 누락으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정부 R&D로 얻은 특허를 연구자가 3자에게 명의 이전하거나 판매하는 횡령이나 배임이 발생해도 정부가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업의 경우 해외특허 등록 이후 기술 이전으로 인한 수익이 발생하면 일정 부분을 ‘정부납부기술료’로 내야 하지만 특허가 등록되지 않으면 기술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알 수 없다. 특허청 관계자는 “패밀리 특허 외의 추적 안 되는 해외 특허들이 상당히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내부적으로 각 기관에 NTIS 입력 상황을 확인하고 연구자들에게 입력 요청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윤두현 의원은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 R&D 해외 특허 성과의 대부분을 정부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정부 R&D 해외 특허 성과의 관리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체계적인 R&D 성과관리체계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패밀리 특허

자국에 특허출원을 한 뒤 1년 안에 다른 나라에도 같은 특허를 출원할 때 원출원 국가의 특허출원일을 인정해 심사받을 수 있는 제도로 묶인 특허. 예를 들어 한국에서 2023년 1월 1일에 특허출원을 한 뒤 미국에서 같은 해 6월 1일에 특허출원을 할 경우, 원출원 국가인 한국의 특허출원일(2023년 1월 1일)을 인정해준다. 각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기는 비슷한 특허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