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노벨물리학상 시상식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는 피터 힉스 교수의 모습. 그가 힉스 가설을 제시한 지 49년 만의 수상이었다. 수상 확정 소식을 들은 후 그는 “기다림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밝혔다. /AFP 연합뉴스

우주 생성의 비밀을 푸는 ‘신(神)의 입자’로 불려온 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측한 물리학자 피터 힉스(94) 영국 에든버러대 명예교수가 별세했다. 그가 재직했던 에든버러대는 9일(현지 시각) 성명을 통해 “힉스 교수가 지난 8일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힉스는 2013년 현대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힉스 입자’를 예측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힉스 입자’는 우주 대폭발(빅뱅) 등 우주의 형성 원리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현대물리학의 대표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64년 35세 조교수 신분으로 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측한 논문을 발표하고, 실제로 힉스 입자가 관측돼 노벨상을 받기까지 50년 가까이 기다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이전에도 오랜 시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물리학계의 스타였다. 뉴욕타임스는(NYT)는 이날 부고를 통해 “그는 일종의 걸어다니는 과학 기념비이자 에든버러의 관광 명소였다”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이해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35세에 ‘신의 입자’ 예측

힉스가 명성을 얻은 것은 1964년 기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가상의 입자’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다. 우주 탄생의 원리를 설명하는 입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기본 입자들로 구성되는데, 힉스는 이들에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가 별도로 더 있다고 추정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학술지에 발표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상으로 추정한 이 입자가 ‘힉스 입자’로 불리게 된 것은 한국 출신 입자 물리학자 고(故) 이휘소 박사 때문이다. 이 박사가 페르미 국립가속기 연구소에 재직중이던 1972년 발표한 논문에서 ‘힉스 입자’라는 말을 처음 썼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물리학 관련 모임에서 교류했다고 한다. 입자에 자신의 이름이 붙자 힉스는 당황했고 다른 연구 그룹들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힉스는 한동안 해당 입자를 연구에 기여한 이들의 앞글자를 따 ‘A·B·E·G·H·K·H 입자’로 부를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힉스 입자’의 별명인 ‘신의 입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언 레더먼의 책 때문이다. 그는 1993년 입자 물리학 관련 책을 쓰면서 특히 힉스 입자가 발견하기 어렵다며 책 제목을 ‘빌어먹을 입자(Goddamn Particle)’로 지으려 했다. 당시 출판사 편집자가 이를 순화해 신의 입자(God Particle)로 출간하면서 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과학자들이 그렇게 추적했던 ‘힉스 입자’는 힉스가 가설을 제시한 지 48년이 지난 2012년 드디어 발견됐다. 당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세계 최대 규모 입자 가속기를 이용한 실험으로 힉스 입자를 확인했다. 이 실험에 매달린 세계 각국의 과학자가 6000여 명에 이른다.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동료 과학자와 내기에서 ‘힉스 입자는 없다’에 100달러를 걸었다가 힉스 입자가 발견돼 돈을 잃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의 획기적 발견이었다.

◇“이론 발전 못 따라가”... 논문 발표 거의 못 해

힉스는 1929년 5월 영국 뉴캐슬어폰타인의 음향 엔지니어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폴 디랙이 졸업했던 학교에 다니면서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킹스 칼리지 런던에 입학해 1950년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고 1954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가디언은 그가 물리학을 포기할 뻔한 적이 있었다고 전했다. 연합군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였다. 힉스는 “그건 내가 절대로 관여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에든버러 대학에 자리 잡은 후 유럽 최대 규모의 반핵 단체 핵군축 캠페인과 그린피스에서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지만, 두 단체가 자신의 생각보다 너무 급진적으로 변하자 탈퇴했다.

힉스는 평생 TV도, 휴대폰도 없이 살았고,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 활동을 즐기는 소박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BBC와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다면 진작에 해고됐을 골칫거리”라고 표현했다. 힉스 입자 이후로는 논문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입자 이론의 발전을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그는 ‘힉스 입자’ 발견 이후 초대칭성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연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주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회상했다. 힉스는 생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오늘날과 같이 바쁜 학계 분위기에서는 획기적인 이론을 정립할 시간이나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며 “(힉스 입자가 아니었으면) 나는 고용도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힉스 입자(Higgs particle)

우주 대폭발(빅뱅) 직후 나타난 기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한 입자. 힉스 입자가 없으면, 물질들이 서로 뭉치며 우주 만물이 탄생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힉스를 비롯한 물리학자들이 1964년 논문에서 가설을 통해 힉스의 존재를 주장했고, 48년 후인 2012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힉스 입자의 존재를 처음 확인했다.

☞표준 모형(Standard Model)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기본 입자들이 서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기본 입자는 총 17종류가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쿼크와 랩톤) 12종, 힘을 매개하는 입자(매개 입자) 4종, 이들 입자에 질량을 부여한 힉스 입자로 구성된다. 이 입자들이 전자기력, 약력, 강력 등 힘으로 상호 작용해 우주 만물을 이루게 됐다는 게 표준 모형 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