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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미국 실리콘밸리 바이오 스타트업 ‘테라노스’는 피 한 방울로 암을 비롯한 250가지 질병을 15분 안에 진단할 수 있는 키트 ‘에디슨’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스는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자산 45억달러(약 6조원) 돈방석에 앉았다. 하지만 약 1년 만에 그의 말은 모두 거짓으로 조사됐다. 혈액 진단 기술을 증명하는 실험 결과는 단 하나도 없었고, 실제 진단 가능한 항목은 평범한 혈액 검사 수준이었다.

‘사기극’으로 막을 내렸던 진단 기술이 인공지능(AI)을 만나면서 현실로 구체화되고 있다. AI가 암이나 알츠하이머 등 치명적 질환들을 조기에 진단하고 발병 전에 예측하며 의학을 혁신하는 것이다. 정확성은 임상을 거치며 확인되고, 그 수준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환자의 유전 정보와 생활 습관 등을 토대로 맞춤형 치료를 받는 ‘정밀 의료’의 시대가 열린다는 기대가 나오는 배경이다.

◇질병 예측에서 치료까지

글로벌 대형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는 지난해 9월 1000개 이상의 질병을 의사와 유사한 수준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는 AI 모델 ‘밀턴(MILTON)’을 공개했다. 밀턴은 영국인 50만명의 유전정보 등이 담긴 ‘UK바이오뱅크’의 생체 데이터를 학습했다. 유전자를 포함해 성별과 허리둘레, 적혈구와 백혈구 수, 체내 영양소 등 67개 항목별 특성을 토대로 질병의 위험도를 예측한다. 밀턴은 주요 질환 3213개 중 1091개는 의사와 유사한 수준의 정확도로 예측했고, 당뇨병(1형) 등 121개의 질병에 대해서는 100%에 가까운 예측 정확도를 보였다. 아스트라제네카는 “밀턴을 통해 미래에 질병을 더 일찍, 치료 가능한 단계에서 감지할 수 있다”며 “아직은 연구 단계지만, AI가 질병을 예방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잠재력은 확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픽=백형선

예측을 넘어 치료에 도움을 주는 AI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 로엔서지컬이 개발한 신장결석 수술 로봇 ‘자메닉스’는 AI를 이용해 결석 크기를 추정하고, 환자의 호흡까지 계산해 레이저가 정확히 결석만 부술 수 있게 해준다. 직경 2.8㎜ 내시경 로봇과 컴퓨터, 의사 1명만 있으면 수술이 가능하다. 현재 서울대병원 등에서 이 기기를 사용하고 있다. AI를 적용한 의료 기기의 수는 급증하고 있다. 2024년까지 미 식품의약국(FDA)이 허가한 AI 의료 기기의 수는 1016개인데, 이 중 절반이 넘는 552개가 2022년 이후 허가를 얻었다.

◇영상 분석해 조기 진단

AI는 자기공명영상(MRI) 등 의료 영상을 분석해 질환을 조기 진단하는 데 성과를 내고 있다. 본지가 최근 찾은 아주대병원 영상의학과 연구실. 최진욱 교수는 모니터의 3차원 뇌 혈관 영상에서 환자의 뇌동맥류 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뇌동맥류는 뇌동맥 일부가 약해져 풍선이나 꽈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질환이다. 원래는 의사가 영상 속 수많은 혈관을 살펴보면서 부풀어 오른 부분을 찾아야 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오류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 교수가 국내 의료 AI 기업 딥노이드의 AI 설루션 딥뉴로를 사용하자, 복잡하게 꼬인 뇌 내 혈관에서 파열 가능성이 높은 지점이 네모 모양으로 표시됐다. 최 교수는 “이 시스템 도입으로 판독 시간이 절반으로 줄고, 정확도가 크게 좋아졌다”고 했다.

국내 의료 AI 기업 루닛은 유방암을 조기 진단하는 AI 설루션을 개발했다. 환자의 유방 촬영 영상을 분석해 종양이나 석회 등 의심 부위를 동그랗게 표시해준다. 뷰노가 개발한 AI 기반 심정지 발생 위험 감지 의료기기 ‘딥카스’는 병동에 입원한 환자의 혈압, 맥박, 호흡, 체온 등을 분석해 24시간 내 심정지 발생 위험을 알려준다. 김대수 KAIST 교수는 “AI는 복잡한 신체의 생명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새로운 현미경”이라며 “인류의 건강과 공중보건을 혁신하는 핵심 기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했다.

☞정밀 의료(precision medicine)

유전정보, 생활 습관 등 개인별 세밀한 건강 정보를 토대로 최적화된 진단과 치료를 하는 것. 인공지능(AI)과 결합하면서 질병의 예측과 조기 진단의 정확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