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 환자 숫자가 8년 만에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지난 13일 서울의 한 어린이병원을 찾은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가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뉴스1

인플루엔자(독감), 신종코로나19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 사람메타뉴모바이러스 감염증(HMPV) 등 호흡기 감염병 4개가 동시에 유행하고 있다. 모처럼 긴 설 연휴를 맞아 멀리 떨어진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일 가능성이 큰 만큼 보건당국도 비상이 걸였다.

여러 유형의 바이러스가 확산하고 있어서 한 번 감염병에 걸렸더라도 다른 감염병에 또 걸릴 가능성이 있다. 고위험군의 경우 중환자실 병상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이번 명절이 최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호흡기 감염병 4종이 동시에 유행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매년 겨울철이 되면 호흡기 질환이 4~5개씩 유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감을 비롯한 호흡기 감염병의 확산 속도가 비교적 빠르고, 규모가 크다는 점이 문제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소셜미디어에 “RSV가 제일 먼저 유행했고, 그다음 인플루엔자, HMPV까지 확산해 이제 코로나19만 남았다”며 “호흡기 바이러스가 4개 동시 창궐하는 ‘쿼드리플데믹(quadrupledemic)’을 이루는 건 아닌지 외래 보기가 겁난다”는 글을 올렸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독감 증상을 보인 의심 환자는 지난해 12월 첫째주(1~7일)에 인구 1000명당 7.3명에서 올해 1월 첫째주(2024년 12월 29~2025년 1월 4일) 99.8명으로 한 달 만에 14배가량 증가했다. 이는 관련 집계를 시작한 2016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코로나19 입원 환자도 최근 3주째 증가세다. 특히 입원 환자 중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62.9%로 가장 많다. RSV 유행도 심상치 않다. 독감에 비해 RSV에 감염됐던 사람이 적고, 아직 국내에 출시된 백신이 없어 집단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만큼, 확산 추이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호흡기 감염병은 흔히 감기라고 하는 급성 비인두염을 비롯해 급성 인두염, 급성 후두염, 급성 인후두염 등 상기도 감염병과 폐렴, 기관지염 등 하기도 감염병으로 나뉜다.

가장 흔한 감염 원인은 손을 통한 바이러스 감염이다. 주로 기침·재채기할 때 나오는 침방울(비말)이 직접 호흡기 등으로 들어오거나, 눈·코·입 등에 존재하는 점막을 통해 노출돼 감염을 일으킨다. 손에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면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경우에도 감염될 수 있다.

호흡기 감염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독감 증상으로 알고 있는 고열, 기침, 인후통, 전신 통증, 근육통, 두통, 상기도 또는 하기도 염증 등이다. 그러나 면역력이 약한 영유아·고령층의 경우 호흡 곤란, 누런 가래가 나오는 기침 등으로 폐렴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번져 심하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다. 특히 RSV는 출생 후 2년 내 대부분의 어린이가 초감염(첫 감염)을 경험하는데, 이 중 20~30%는 세기관지염(폐의 작은 기도의 염증)과 폐렴으로 진행된다.

독감 의심 외래환자 수는 1월 2주차(5∼11일) 1000명 당 86.1명으로 전주 대비 13.7% 감소하면서 유행 정점은 다소 지난 것으로 보이지만, 전문가들은 오는 25~30일 6일 간의 설 연휴가 고비라고 강조했다.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독감 의심 환자 수가 정점을 지났지만, 통상 연휴가 끝나면 증가세로 전환돼 1~2주 후에 다시 정점을 찍게 될 수 있다”며 “연휴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공간을 구획 지어 의심 환자나 고(高)위험군을 격리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마스크 착용·손 씻기 등 방역수칙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며, 증상이 있는 사람은 이번 명절 모임에서 제외하는 문화적인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엄 교수는 입원 환자 증가로 인한 중환자실 병상 부족 문제가 가장 우려된다고 했다. 그는 “호흡기 바이러스 감염 시 호흡기 점막에 손상이 생긴 뒤에 세균에 감염돼 폐렴으로 번지는 사례가 많은데, 의심환자 수는 정점을 지났을 수 있지만, 정점 이후 2주까지 입원 환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라며 “환자를 볼 의료진이 부족한 데다, 최근 영유아나 노인층 중환자들이 입원할 곳이 없는 게 현재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러한 우려가 이어지자 보건복지부는 지난 16일 설 연휴 응급 의료 체계 유지 특별 대책을 발표했다. 의정 갈등 사태에 따른 비상 진료 체계가 1년 가까이 이어지는 데다, 최근 독감·코로나 등 호흡기 질환 유행까지 겹쳐 지난 추석 연휴 때보다 대책을 늘렸다. 복지부는 특히 이달 22일부터 2월 5일까지 2주간을 ‘설 명절 비상 응급 대응 주간’으로 지정하고, 의료 체계를 집중 점검·지원할 예정이다.

복지부는 최장 9일간 이어지는 장기 설 연휴에 강도 높은 의료 지원 대책을 추진한다. 최우선으로 중증·응급 수술 지원을 강화한다. 의료진이나 병상 부족으로 중증 치료가 늦어지거나 응급실 ‘뺑뺑이’가 벌어지는 상황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권역응급의료센터와 지역응급의료센터 181곳을 대상으로 중증·응급 수술에 대한 야간·휴일 수가를 100% 추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수가 가산은 종전 200%에서 300%까지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