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왜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유아기 기억상실(Infantile Amnesia)은 유아의 해마(hippocampus) 발달이 늦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추정이었다. 기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마가 발달되지 않아 아예 기억 형성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기에도 기억을 형성할 수 있으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출력’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예일대 연구팀은 생후 4~25개월 영아들의 뇌를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분석한 결과, 생후 12개월부터 기억을 저장하는 능력이 발달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지난 21일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생후 4~25개월 영아 26명을 대상으로 fMRI를 이용해 뇌를 스캔하면서 기억력과 관련된 과제를 하도록 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얼굴, 풍경, 사물 등의 사진을 아기들에게 보여준 후, 다시 같은 사진을 보여줄 때 시선 반응을 측정해 기억 여부를 추정하며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측정했다. 아기들은 아는 사진을 보면 더 오랫동안 사진을 응시했으며, 해마의 활동이 증가했다. 영아기의 기억이 비록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더라도 이 시기의 기억을 일화로 저장하는 메커니즘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팀은 “아기들의 해마가 생후 12개월쯤부터 개별적인 경험의 기억을 암호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이번 실험 결과가 “유아기 기억상실은 기억 형성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형성된 기억을 인출하는 과정에서 실패가 발생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유아기 기억이 장기 저장소로 변환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유아기 기억이 성인이 된 후에도 뇌에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접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기억을 인출하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해마가 기억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앞서 동물 실험에서 확인됐다. 2023년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연구팀은 새끼 때 미로 탈출 훈련을 받았다가 성체가 된 후 탈출구의 위치를 잊어버린 쥐들의 해마를 활성화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해마가 활성화되자 성체 쥐들은 다시 미로를 탈출할 수 있게 됐다. 저장돼 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