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본사를 둔 글로벌 대형 제약사 로슈(Roche)가 5년간 미국에 500억달러(약 71조 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올해 들어 미국 제약사 일라이 릴리와 존슨앤드존슨(J&J),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 등 글로벌 빅파마들이 줄줄이 대규모 미국 내 생산 시설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무관세였던 의약품에도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미국 내 의약품 생산을 압박한 데 따른 영향으로 풀이된다.
로슈는 22일(현지 시각) 향후 5년간 미국에 500억달러를 투자해 제조·생산, 연구개발(R&D) 시설을 신설·확대 하겠다고 발표했다.
회사에 따르면, 미국에 90만 평방피트(약 8만3612㎡) 규모로 첨단 제조시설을 건립한다. 이 시설은 로슈가 개발 중인 차세대 비만 치료제를 생산할 예정이다. 제조시설이 들어설 위치는 공개하지 않았다.
로슈는 인디애나주에는 연속 혈당 모니터링 기기 제조공장을 신설하고, 펜실베이니아주에는 최첨단 유전자 치료제 생산시설을 새로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투자 계획에는 매사추세츠주에 새로 짓는 R&D 센터 건립 사업도 포함돼 있다. 해당 센터는 심혈관, 신장, 대사 질환 연구의 허브가 될 것이라고 회사는 설명했다.
또 기존 애리조나, 인디애나,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제약·진단 R&D센터를 확장하고, 공급망 거점인 켄터키, 인디애나, 뉴저지, 오리건,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제조·유통 시설의 역량도 강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로슈는 현재 미국 8개 주에 24개 시설과 약 2만5000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회사는 이번 투자로 약 1000개의 일자리가 새로 창출될 것으로 전망했다.
토마스 쉬네커 로슈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발표에서 “이번 투자는 미국 내 연구, 개발, 제조에 대한 당사의 오랜 헌신을 담고 있다”며 “이번 조치로 미국과 전 세계 환자들을 위한 혁신과 성장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투자가 완료되면 미국에서 생산한 의약품의 해외 수출이 미국의 로슈 의약품 수입보다 더 많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빅파마들은 미국 내 투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수입 의약품에도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의사를 보이며 생산 시설을 미국에 두라고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백악관에서 일라이 릴리, 머크(MSD), 화이자 등 미국 주요 제약사 CEO들을 비공개로 만났고, 이 자리에서 미국으로 생산 시설을 옮기라고 압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2월, 일라이 릴리는 270억달러(약 39조원)를 투입해 미국에 생산시설 4곳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뒤이어 3월 J&J는 550억달러(약 79조원)를 투자해 미국에 3개의 생산 시설을 신설하고 기존 시설을 확장하겠다고 밝혔다. 노바티스는 지난 10일 향후 5년간 미국에 10개 생산시설을 신설·확장하는 데 230억 달러(약 33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의약품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달 발표한 상호 관세 부과 대상에서 빠졌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의약품에도 별도 관세 부과를 검토하고 있다.
미국의 관세 정책 발표 이후 유럽 내에서 우려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유럽제약산업협회(EFPIA)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에게 “유럽이 신속하고 급진적인 정책 전환을 하지 않는 한 수십억 유로의 바이오의약 투자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U의 정책 변화가 없으면 EU에 대한 투자 유인이 줄고, 미국으로 투자와 R&D, 제조 인프라 유출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