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28번(봉지)에 모둠 나물 넣어줘.” “잡채에 아이스 팩 좀 붙여줘.”
11일 오후 서울 강동구 암사종합시장의 반찬가게인 ‘순수한찬’. 대표 김영주(44)씨를 비롯해 세 명이 계속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 사람은 비닐봉지에 ’27′ ’28′과 같은 숫자 스티커를 붙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스마트폰 앱에 뜬 주문대로 반찬을 포장했다. 순식간에 비닐봉지 30여개가 만들어졌다. 김 대표는 “오후 3시까지 갖다놔야 하는데 늦었다”며 반찬이 든 비닐봉지를 손수레에 담아 시장 한쪽에 있는 ‘공동배송센터’로 바삐 향했다.
컨테이너 임시 건물인 배송센터는 상인들로 북적였다. 배송센터에는 1부터 70까지 번호가 붙은 사각형 바구니가 층층이 놓여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주문한 고객 번호다. 20번 바구니에는 고객 주문대로 떡집 사장이 가져온 인절미, 정육점 직원이 가져온 삼겹살 두 근, 반찬집의 김치 겉절이가 차곡차곡 담겼다.
◇스타트업과 손잡고 ‘2시간 배달’
42년 역사의 서울 동남권 대표 전통시장인 암사종합시장이 ‘비(非)대면 온라인 시장’으로 변신 중이다. 코로나 사태가 가져온 ‘자의 반 타의 반’ 변화다. 스타트업인 ‘우리동네커머스’, 네이버와 손잡은 이후 이 시장은 오후 1~3시가 가장 바쁘다. 고객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주문한 상품은 오후 1시에 마감돼 시장 상인들의 스마트폰 앱으로 전달된다. 상인들은 그때부터 주문 상품을 포장해 오후 3시까지 배송센터로 가져다주면 배달기사들이 고객에게 전달한다. 서울 전역은 물론 경기 성남까지 당일 오후 7시 안에 배송해준다. 시장이 있는 강동구 고객은 오후 7시까지는 언제 주문해도 2시간 이내 배달 받는다. 스타트업은 구매부터 배송까지 실질적인 운영을, 네이버는 주문 통로(‘동네시장 장보기’) 역할을 맡는다.
암사시장이 배달 서비스를 시작한 건 작년 1월이다. ‘온라인 매출이 새로 생긴다’며 좋아할 법했지만 상인들은 변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족발집을 하는 최병조(55) 상인회장은 “스마트폰(온라인)으로 물건을 팔면 사람들이 시장을 찾지 않게 되고, 전통시장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반대가 심했다”고 했다. 단골이 많은 시장 상인들 입장에선 온라인 손님은 ‘뜨내기’였던 것이다.
스타트업 청년 직원들이 달라붙어 1년 넘게 공을 들였다. 상품 사진을 일일이 찍어 온라인에 올리고 시장 상인용 앱 관리와 오토바이 배달, 고객 대응까지 도맡았다. 시장 상인한테서 도매가에 상품을 공급받아 시장 판매가격과 같거나 10% 정도 마진을 붙여 온라인에서 팔아 운영비를 충당했다. 네이버는 고객이 전통시장 상품을 살 수 있도록 플랫폼만 제공할뿐 별도 수익은 얻지 않고 있다.
대형마트 바이어 출신인 김상돈(35) 우리동네커머스 대표는 “시장 근처 오피스텔에서 직원 셋이 상주하다가, 스마트폰 주문이 들어오면 직접 시장으로 뛰어가 결제하고 물건을 받아 오토바이로 보내는 식이었다”고 했다. 직원 셋이서 손수레를 끌고 6개월간 시장을 누비자 변화의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고 한다. 그래도 올 초까지 참여 점포는 120곳 중 10곳 정도에 그쳤다.
◇"어렵지만 가야 한다는 것 알아"
분위기를 바꾼 건 코로나였다. 시장 인근에 코로나 확진자가 잇따라 나오면서 매출이 뚝뚝 떨어졌다. 일찌감치 배달 서비스를 시작한 상점 매출은 올랐다. 상인들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10곳 남짓했던 온라인 배달 점포가 지금은 33곳으로 늘었다. 반찬 등 일부 인기 상점은 배달을 시작한 이후 매출이 30%가량 올랐다. 후레쉬정육점 손형일(40) 대표는 “현재 매출에서 온라인 비율이 10% 정도 되는데 꾸준히 늘고 있다”고 했다.
비대면 경험은 완고했던 상인들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많이 주문하면 오프라인처럼 덤을 얹어주고, ‘주문해줘 고맙다’는 작은 쪽지를 비닐봉지에 넣어 보내는 곳도 생겼다. 스마트폰에 하나둘씩 달리는 고객 평을 읽으며 ‘아, 이런 건 고쳐야겠구나’ ‘이건 간이 좀 짰구나’ 하는 피드백도 받게 됐다.
신선도가 생명인 생선가게는 배달 중에 상할까 봐, 꽈배기 집은 혹시 다른 물건에 짓눌릴까 봐 배달을 주저하기도 한다. 가격 차가 한눈에 드러나는 온라인 방식을 불편해하는 상인도 있다.
그래도 상인들은 이게 가야 할 길이란 걸 알고 있다. ‘대형마트 규제도 도움이 되긴 하지만 한계가 있고, 비대면·모바일 문화에 적응하며 자체 경쟁력을 키우는 게 살길이다’라는 것이 상인들의 얘기다. 문경푸른생선을 운영하는 심인숙(50)씨는 “내 자식도 그렇고, 요즘 젊은이들은 배달 앱으로 시켜 먹는 거 선호하지 않느냐”면서 “이제는 머리를 써야 살아남는 시대인 만큼 시장도 많이 달라지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우리동네커머스는 암사시장에서의 경험을 다른 시장으로 퍼뜨리고 있다. 김상돈 대표는 “현재 암사시장을 비롯해 전국 40여 시장에 배달 서비스를 도입했고, 연말까지 100곳으로 늘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네이버 장보기서비스 김평송 리더는 “전통시장 상인들이 온라인 시대에 대비할 수 있도록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고, 이용자들이 동네 시장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서비스를 지속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