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방산 산업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 특수한 시장이다. 문제는 미국과 유럽의 기업이 방산 산업의 토대인 방탄용 고성능 복합재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고성능 복합재를 자체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신 소재를 수급받지 못한 방산업체들은 구형 소재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는 ‘뚫린 방탄복’ 같은 문제와 연결된다.
한국정밀소재산업의 윤형수(44) 대표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탄용 복합재 국산화라는 어려운 길에 도전했다. 설비를 직접 개발해, 복합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길을 텄고 생산 단가까지 낮췄다. 스타트업 덩치로 어떻게 진입 장벽이 높은 방산 산업을 대상으로, 그 어렵다는 중간재 비즈니스를 펼치게 된 걸까. 윤 대표를 만나 이모저모를 들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고 결심한 것
윤 대표는 고려대에서 생명공학과 화학을 복수 전공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의 아라미드팀 TF 멤버로 입사했다. 아라미드는 500도 이상의 고열을 견디는 수퍼 섬유다. 강철에 준하는 보호 성능을 갖췄지만 훨씬 가벼워서 철의 대체품으로 차량이나 방탄 소재로 활용된다. 그는 코오롱인더스트리에서 미국 방산 업체를 대상으로 해외 영업을 했다.
이후 글로벌 방산 기업인 하니웰(Honeywell)로 이직해, 아시아 방산 사업을 총괄했다. “이른바 ‘테크니컬 마케팅’을 담당했습니다. 호주,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의 국방 담당자를 만나 세미나를 열고, 미국의 선진 기술을 소개했죠. 방산 시장은 특수한 시장입니다. 선진국에서 방탄 소재의 스펙을 한껏 끌어올리면, 나머지 국가들도 이를 따라잡아야 합니다. 국방력과 직결된 문제니까요.”
방산 시장에 몸담으면서 이 시장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방탄용 고성능 복합재 시장은 미국 및 유럽 기업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전략 소재 자국 우선 공급을 법제화하고 있어서 타 국가에 대한 공급이 제한적입니다. 영업 대상을 US와 ROW(Rest of world. 나머지 국가)로 분류할 정도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방산업체들은 공급이 막히면 무겁고 성능이 떨어지는 옛날 소재로 방탄복과 헬멧을 만들어야 합니다. 국군 방탄복이 뚫리는 심각한 문제가 종종 발생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실정이죠.”
더 큰 문제는 복합재를 자체 수급할 수 없는 구조다. “복합재 제조 기술은 원단 제조에 빗댈 수 있어요. 실(소재)을 배열해 원단(복합재)을 만들면, 그 원단으로 옷(방탄복 등 최종 생산물)을 만드는 것이죠. 미국이나 유럽은 원사의 기능을 100% 발현하는 2세대 기술인 적층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중남미 국가의 기술력은 1세대인 평직 기술에 그칩니다. 원사를 꼬아서 원단을 짜니 수퍼섬유의 성능이 75%밖에 발현되지 않아요. 그렇다 보니 코오롱인더스트리, 태광산업 등 국내 기업이 생산한 원재료를 해외에 수출해 해외에서 가공 후 국내 부품 생산자가 전량 역수입해야 합니다.”
복합재를 역수입하는 과정에서 비용 부담이 커지고, 이익률은 떨어진다. 2세대 기술을 보유한 선진 국가들은 보다 높은 이익률을 취할 수 있다. “처음 코오롱인더스트리에 입사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아라미드로 손꼽히는 사람이 되겠다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외길을 걸었고요. 이 시장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 복합재를 원활하게 공급해주는 중간의 존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원사 뽑는 산업만 활성화됐습니다. 한국의 소재, 부품 산업이 모두 발전하려면 중간재를 하는 곳이 꼭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국과 아시아 군인들도 2세대 소재를 쓸 수 있게끔 하고 싶었어요.”
◇복합재 국산화 위해 설비부터 자체 개발
2020년, 방탄용 고성능 복합재 개발과 국산화를 목표로 한국정밀소재산업을 설립했다. 2세대 기술의 핵심인 적층 설비를 구하기 위해 해외에 있는 설비 제조사 문을 두드려 견적을 받았다. 이때 크나큰 장벽을 마주했다. 설비가 대당 120억원을 호가했던 것이다. 인건비까지 합치면 200억원의 자본이 있어야 가능한 사업이었다. 스타트업 규모로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포기할 수 없어서 삽부터 뜨기로 했다. 적층 설비를 직접 개발하기로 했다. “적층 설비의 공정 과정은 크게 섬유, 필름, 화학 배합, 물리 공정 4단계로 이뤄졌는데요. 공정별로 설비를 만들었습니다. 1차 가공물을 만든 뒤 2차, 3차, 4차 가공을 거쳐 방탄 실험을 했는데 성능이 좋았어요. 그 후 4개의 설비를 붙여서 자체 설비를 구축했습니다.”
창업 후 1년 반 만에 설비를 완성했다. 설비 가격은 대당 수십억원대로 대폭 낮춰 생산 원가를 절감했다. 설비를 확충하기 위해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한국에서 웬 제조업이냐, 제조업은 해외에서 해야 한다’는 냉대에 직면했습니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죠. 아직 검증이 안 된 스타트업에 30억원을 투자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니 이해는 갔습니다.”
어떻게 의지를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3000평 규모의 공장을 산 뒤 맨땅에 헤딩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어요. 큰 공장에 레이저 커팅기를 들여서 외주로 가공 사업을 하면서 버텼습니다. 캣타워도 만들었어요. 방탄 소재의 특성을 살려 냉감 이불도 만들었습니다. 간신히 버티다 2022년, 10억원 규모의 시드투자를 유치했어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죠.”
◇국제 분쟁 발발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
2023년 6월, 첫 양산 설비를 들이면서 생산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이 시점에 큰 국제 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이 발발한 것이다. 주문이 쏟아졌다. 단 6개월 만에 44억원의 매출이 발생했다. 번 돈으로 차츰 설비를 늘려갔다. 강원도 원주에 1000평 규모의 공장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고 기존의 공장도 증축에 들어갔다.
한국정밀소재산업의 강점은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이다. “자체적으로 설계한 적층 설비로 해외 유명 기업에 견줄 만한 방탄 소재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원재료를 해외 기업 대비 저렴하게 수급할 수 있어서 경쟁사 대비 생산 원가가 약 40% 저렴합니다. 가장 좋은 점은 즉각적인 대응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외 기업에서 복합재를 구매할 경우 대금 지급 후 9개월 후에 물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로 공급받을 길이 없으니 사재기하는 경우도 허다한데요. 저희는 주문 즉시 납품할 수 있으니 탄력적이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일반 업체도 방탄 소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죠.”
실제로 다양한 산업군에 복합재를 적용할 수 있다. “소재 경량화가 화두가 되면서 다양한 산업에 복합재가 활용되는 추세입니다. 풍력 발전소의 블레이드(날)의 경우, 크기가 클수록 생산 효율이 좋아집니다. 유럽에서는 25m짜리 날도 개발하고 있죠. 하지만 한국에서는 15m 정도가 한계였어요. 만약 2세대 기술을 적용하면 생산 가능 면적을 넓힐 수 있습니다. 방산 기술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건물이나 다리 보강재 같은 단위가 큰 인프라는 물론 캠핑 용품이나 골프채 같은 레저 용품에도 도입 가능하죠. 이렇게 활용성이 좋은데, 초경량 복합재가 확산되지 않은 건 수급 이슈 때문입니다. 저희 같은 기업의 존재는 이 산업에 접근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방탄 소재 생태계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쏟아지는 주문에 24시간이 모자라
아시아에서 적층 설계로 초경량 복합재를 생산하는 기업은 한국정밀소재산업이 최초다. 기술력과 상징성을 인정받아 LB인베스트먼트, 하나벤처스, 인라이트벤처스, KDB인프라자산운용,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 등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누적 117억5000만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투자금은 설비 확충에 재투자했다. 1년에 2000t의 초경량 복합재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채산성을 끌어올렸다. 생산량의 90%가 수출 물량으로, 미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방산 업체로 납품한다. 2024년 연매출 108억원을 기록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원사 생산까지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지금은 원사를 사서 원단을 만들고 있지만, 원사를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는 리스크가 큽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주요 원사 수입국인 중국은 전략 물자를 지정해서 관련 제품과 소재, 기술의 수출을 규제하는데요. 수퍼섬유도 전략 소재이기 때문에 대외적인 변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소재까지 국산화해서 수급 문제를 뿌리부터 해결하고 싶습니다. 더 길게는 수퍼섬유 산업의 중추가 되고 싶습니다. 중간자가 가까이 있으면 앞 단과 뒷 단의 산업도 함께 발전합니다. 저희의 존재가 한국 소재, 방산 산업 성장의 촉매제가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