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 치료법을 개발하면 노벨상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탈모는 많은 사람이 경험하고 있지만, 지독한 난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 2025에서 주목받은 회사가 있다. ‘폴리페놀팩토리’다. 이 회사는 탈모 예방 샴푸 ‘그래비티’를 내놨는데, 행사 첫날 준비한 샘플 1만개가 동났다. IT 전시회에 샴푸를 내놓은 이해신 대표는 “세계 첨단 기술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 샴푸도 과학이란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 샴푸의 핵심 성분은 ‘폴리페놀’(Polyphenol)이다. 홍합 껍데기의 접착 물질 등에 든 성분인데, 강한 파도에도 홍합이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해신 대표는 “폴리페놀은 접착과 코팅 성능이 뛰어나 지혈제, 속눈썹 접착제 등 활용 분야가 무궁무진한 성분”이라며 “샴푸 속 폴리페놀은 모공에 달라붙으면서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을 막고, 모발 전체에 보호막을 입혀 머리 볼륨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샴푸만큼 화제가 된 건 이 대표의 이력이다. 그는 카이스트 생명과학과를 나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카이스트 화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폴리페놀 연구에 집중하면서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표지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의 인용 횟수는 1만회가 넘는다. 이후 사이언스지에도 폴리페놀 논문을 발표했고, 2023년 카이스트 교원 창업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뷰티 회사인 폴리페놀팩토리를 만들었다.
이 대표는 앞서 폴리페놀을 활용해 ‘발색 샴푸’를 만든 이력이 있다. 폴리페놀은 사과가 갈색으로 변하는 등의 갈변 현상에도 관여하는데, 이를 활용해 발색 샴푸 ‘모다모다’를 개발했다. 명절날 고향집에 갔다가 어머니가 독한 염색약 성분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본 게 개발의 계기였다.
이 대표는 샴푸를 개발하고 여러 대기업 문을 두드렸다. 기술을 제공할 테니 제품을 함께 내놓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낯설다’며 모두 거절했고, 결국 지인의 작은 회사를 통해 제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제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했다. 샴푸에 위해 성분이 들었다면서 식약처가 판매 금지 처분을 내린 것이다. 이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선 문제없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그동안 경쟁 제품이 우후죽순 나오면서 존재감이 사라졌다. 이 대표 개인적으로는 기술 사용료 분쟁을 겪는 일도 있었다.
이후 스스로 회사를 만들어 절치부심 내놓은 게 ‘그래비티’ 샴푸다. 이 대표는 “직원들과 하루 4~5번씩 머리를 감으면서 성분을 보완하고, 소비자 피드백을 얻어 제품 콘셉트를 완성했다”고 했다. 비교를 위해 머리 한쪽은 그래비티로 감고, 다른 쪽은 다른 샴푸로 감아 한쪽만 머리가 붕 뜬 상태로 카이스트 교정을 누비기도 했다.
그래비티의 성공 스토리는 진행 중이다. 효능 시험에서 평균 56.2%의 모발 탈락 감소 효과를 입증했다. 결과는 국제 학술지에 등재됐다. 작년 4월 출시 이후 판매량은 1년도 안 돼 80만개를 돌파했다.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라고 한다. 쇼핑몰마다 제품을 공급해 달라고 줄을 서지만, 물량이 달려 ‘조선몰’ 등 몇몇 몰에만 입점해 있다. 그마저 수시로 매진 사례다. 오프라인에선 제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1인당 판매 개수를 제한하는 일도 생겼다.
이 대표는 차기작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속눈썹 접착제, 착색과 탈모 방지가 동시에 되는 에센스, 곱슬머리를 펴주는 샴푸, 머리카락 색상을 밝게 하는 톤업 샴푸 등이 그래비티를 이을 후보”라고 했다.
제품의 화제성만큼이나 ‘카이스트 교수가 품격 떨어지게 웬 샴푸냐’는 편견도 적지 않다. 이 대표는 “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생활용품으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이 기쁘다”며 “보다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과학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이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