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金) 투자 수요가 몰리면서 시중은행의 골드바와 골드뱅킹 판매가 나란히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금값은 대체로 달러가 강세면 떨어지고, 달러가 약세면 올라가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 그러나 작년 이런 추세가 깨졌다.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위험이 부각되며 달러와 금이 함께 강세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후에는 관세로 인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금값이 다시 한번 뛰었다. 국제 금 가격이 트로이온스당 3000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빠르게 오르면서 금을 찾는 수요도 함께 늘었다.
◇골드바 판매 역대 최대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이달 1~13일 골드바 판매액은 총 406억345만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같은 기간 판매액(20억1823만원)의 20배로 껑충 뛴 것이다. 전월 같은 기간(135억4867만원)과 비교해도 거의 3배가 됐다.
특히 골드바 주요 공급처 중 한 곳인 한국조폐공사가 지난 12일 물량 부족으로 골드바 공급을 잠정 중단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진 뒤 판매액은 더욱 늘었다. KB국민은행이 이날부터 골드바 판매를 중단하자, 신한은행과 NH농협은행 판매액이 2배가량 늘어나는 등 다른 은행들로 돈이 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고객이 은행 계좌에 돈을 입금하면, 은행이 해당 금액으로 국제 시세에 따라 금을 매입하는 ‘골드뱅킹’ 계좌 잔액도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 13일 기준 KB국민·신한·우리은행의 골드뱅킹 잔액은 총 8969억원으로 역대 최대다.
가격이 많이 오른 금 대신 은을 찾는 경우도 늘었다. 은 가격은 작년 10월 최고가를 기록한 후 횡보 중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금과 함께 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실버바를 취급하는 KB국민·신한·우리·NH농협은행의 이달 1~13일 실버바 판매액은 5억2889만원으로 전월 같은 기간(3422만원)의 15배에 달한다. 전년 같은 기간에 판매 실적이 제로(0)였던 것과 비교해도 크게 늘었다.
◇외국보다 금값 20% 비싼 ‘김치 프리미엄’
국가 간 금 가격의 차이가 벌어지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서 금 1g 가격은 지난 14일 16만3530원까지 올랐다. 국제 금 시세가 1g당 13만6310원인 것과 비교해 한국에서 거래되는 가격이 20% 가량 더 비싼 ‘김치 프리미엄’이 형성된 것이다. 단기간에 국내 금 수요가 급증하면서 벌어진 현상으로 풀이된다. 이 때문에 프리미엄이 사라지면 국내 금 가격이 국제 금보다 빠르게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이영훈 삼성증권 연구원은 “금은 세계 어디서든 통용되는 가치를 지녀 일물일가(하나의 상품에 하나의 가격) 원칙이 잘 적용되는 대표적 자산”이라며 “한국 내 단기적인 가격 조정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금값이 영국보다 비싼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금에도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우려에 외국에 보관하던 금을 미국으로 반입하려는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투자은행(IB)들은 런던에서 금을 구입해 뉴욕에서 판매하는 차익을 노리고 금괴 수송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뉴욕과 런던의 금값 격차 때문에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규모로 대서양을 건너는 금괴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영국 은행들에 보관한 금괴를 찾는 데 걸리는 기간이 기존 며칠에서 4~8주가량으로 늘어났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안전 자산으로 접근해야”
IB들은 올해 전망했던 금값을 올려 잡고 있다. JP모건과 UBS는 올해 금값 전망치를 트로이온스당 3000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지난 14일 기준 국제 금 시세는 이미 트로이온스당 2933.31달러 선을 기록했다. UBS는 전망치를 상향 조정하며 “올해 내내 불확실성 증가, 글로벌 금리 인하 주기 연장, 투자자와 중앙은행의 강력한 수요로 금값은 계속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봤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미 금값이 많이 오른 만큼 단기 시세 차익을 노리기보다 안전 자산으로 접근할 것을 추천한다. 최선일 신한프리미어 PWM서울파이낸스센터 팀장은 “금·은·달러 등 안전 자산 투자는 포트폴리오 배분 관점에서 장기적 시각으로 해야 한다”며 “금값이 연일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이 시점에 단기 시세 차익 목적의 투자는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