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3번째로 반도체를 많이 구매하는 화웨이에 반도체 판매 길이 막히면서 반도체는 물론이고 IT(정보기술)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제재로 15일부터 모든 반도체 기업들이 화웨이에 제품 공급을 못한다. 중국 화웨이는 작년에 208억달러(24조5000억원)어치의 반도체를 사들여, 애플과 삼성전자에 이은 3번째 반도체 시장의 ‘큰손’이다. 국내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물론이고, 미국의 퀄컴·마이크론, 일본의 소니·키옥시아, 대만의 TSMC 등은 모두 대형 고객을 잃었다.

반면 화웨이는 지난 8월 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공급처를 확립하는 ‘난니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바로 중국의 SMIC, 창신메모리, 양쯔메모리, 하이실리콘 등을 모아,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화웨이로선 분야별 세계 최고 반도체를 구매하다가, 이제는 후발 주자인 중국 기업으로 갈아타야 할 입장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아직은 낮은 수준의 제품을 만드는 수준으로, 세계 최고 기업과는 격차가 크다”고 말했다.

◇13조원씩 구매하던 고객 잃은 한국 기업

화웨이는 세계 스마트폰 2위이자, 통신 장비 1위 업체다. 2억대가 넘는 스마트폰을 제조하면서 세계 90여 기업에서 엄청난 반도체와 부품을 구매한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선 연간 10조3700억원어치의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를 사들인다. 삼성디스플레이에서도 연간 2조5000억원어치의 OLED 패널을 구입했다.

공급망 끊은 글로벌 기업

미국 퀄컴에선 스마트폰의 ‘두뇌’인 AP를 연간 7800억원어치 사들였고, 마이크론에서는 3조3300억원의 메모리 반도체를 구입했다. 대만 TSMC에는 자사의 설계도를 주고, 위탁 생산하는 비용으로만 6조2000억원을 지불할 정도다. 삼성전자 등 대부분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고, 미국 상무부에 “화웨이와 거래를 허용해달라”는 요청서를 보낸 상태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강경 입장을 고려할 때 예외 인정은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중국 샤오미나 오포와 같은 다른 스마트폰 기업을 찾아가, 반도체 추가 판매를 협의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화웨이에서 빠진 물량을 메꿀 새로운 큰손 찾기에 나선 것이다. 대체 고객을 못찾으면 4분기에 조(兆) 단위의 매출 감소를 감내해야 한다.

◇화웨이는 자력 생존 선언

화웨이는 ‘자력 돌파’를 선언한 상황이다. 해외 반도체 기업의 도움 없이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10일 화웨이의 위청둥 소비자부문 CEO는 “어떤 사람도 하늘 가득한 별빛을 꺼트릴 수 없다”고 말했다. 화웨이는 내년엔 독자 개발한 운영체제(OS)인 ‘하모니’를 적용한 스마트폰을 내놓을 계획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달 자국 반도체 기업에 최대 10년간 법인세를 면제 또는 감면해주는 정책을 내놔, 화웨이 지원에 나섰다. 중국은 올 상반기 1440억위안(25조원)을 반도체 산업에 투자했다. 중국의 양쯔메모리(YMTC)는 연말 128단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를 양산할 계획이고 창신메모리는 현재 19나노 공정으로 D램 메모리 반도체 양산을 시작했다. 중국 파운드리 업체 SMIC는 내년 7나노 공정을 도입할 계획이다. 큰손인 화웨이의 물량을 확약받은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약진 가능성이 없진 않다.

중국 반도체 기업이 제대로 된 품질의 반도체를 양산하는 데 성공하면, 샤오미나 오포, 비보 등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들도 줄줄이 해외에서 자국 기업으로 갈아탈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가 바라는 장밋빛 ‘반도체 굴기(우뚝 섬)’ 시나리오다. 한국 반도체 기업으로선 중국 시장을 통째로 잃는 최악의 전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재 중국 반도체 기술력은 한국에 3~5년 뒤처진 것”으로 평가한다. 6개월만에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 이사는 “초등학생이 혼자 독립할 수 없듯이 중국 반도체는 아직 자립하기엔 기술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며 “미국 제재로 화웨이가 붕괴되면 화웨이를 주요 고객사로 두는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 BOE, 반도체 설계 업체 하이실리콘, 파운드리 업체 SMIC가 연달아 휘청일 수 있다”고 했다.

화웨이 내부 분위기도 침울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화웨이가 전시상황에 돌입했다”고 보도했다. 화웨이가 사업 지속이 불가능해졌고 직원들은 동요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감원설도 돈다. 화웨이의 한 직원은 FT에 “앞으로 제품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게 될 텐데 일부 직원이 벌써 이직하고 있다”며 “최근 들어 야근이 사라졌는데, 이게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