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인 미국 인텔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시장에서 대만 TSMC와 삼성전자를 앞지르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모바일 시대로 전환하면서 주춤했던 인텔이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의 등장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주문형 반도체 생산까지 장악해 미국의 반도체 패권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인텔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26일(현지 시각) 온라인 기술 로드맵 발표 행사를 열고 “내년 7나노미터(1nm=10억분의 1m) 반도체를 선보인 뒤 2023년 3나노, 2024년 2나노, 2025년 1.8나노 반도체를 생산해 글로벌 기술 리더십을 거머쥐겠다”고 했다. 나노는 반도체의 회로 선폭을 나타내는 단위로 회로 선폭이 좁을수록 반도체 집적도가 높아진다. TSMC와 삼성전자가 내년 3나노 공정의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하는데 현재 7나노 공정을 개발하고 있는 인텔이 4년 안에 이를 뒤집겠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시장 1위인 TSMC를 뒤쫓고 있는 삼성전자로서는 인텔의 거센 추격까지 신경 써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 2월 인텔 최고경영자(CEO)에 취임한 팻 겔싱어는 반도체 패권을 다시 거머쥐겠다며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최근에는 독일에 공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파운드리 업계 4위인 미국 글로벌파운드리 인수도 검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6일 행사는 인텔의 파운드리 전략이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공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인텔은 이날 전례 없이 공격적인 기술 로드맵을 내놓았다. 현재 7나노미터(nm) 수준인 자사의 초미세 공정을 3년 내에 2나노로 끌어올리고 4년 뒤에는 1나노대까지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인텔은 공식 발표 자료를 통해 TSMC와 삼성전자가 제품 기술력의 핵심 지표로 삼고 있는 ‘나노 경쟁’이 과장됐다는 비판까지 내놓았다. 인텔은 “오랜 기간 업계에서 얘기하는 ‘나노’는 실제 반도체 회로 선폭과 일치하지 않고 있다”면서 “(TSMC와 삼성전자의) 기술 마케팅에 불과하다”고까지 했다. 실제 알려진 것만큼 TSMC·삼성과 인텔의 기술력 격차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인텔은 또 2024년 퀄컴과 아마존의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기로 했으며, 이들 이외에도 100여개 기업과 위탁 생산을 논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바이든 행정부가 인텔을 미국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밀고 있기 때문에 향후 인텔과 미국 기업 간 동맹이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인텔의 계획이 현실화될 경우 삼성전자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올 1분기 기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점유율은 55%, 삼성전자는 17%다. 삼성전자는 5나노 반도체 양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TSMC와의 격차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대만 IT 매체 디지타임스는 최근 “TSMC는 첨단 공정에서 고객사를 대거 확보한 덕분에 7나노 이하 공정에서 발생하는 글로벌 수익의 80%를 가져가고 있다. 삼성이 향후 10년 이내에 TSMC를 이길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며 일방적으로 TSMC를 옹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텔까지 시장에 뛰어들면서 삼성전자가 TSMC와 인텔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인텔의 로드맵이 지나치게 장밋빛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인텔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발표한 기술 로드맵을 달성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면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초미세 공정 계획을 추진할 인력과 기술을 제때 확보할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