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노스 창업자이자 CEO인 엘리자베스 홈즈가 2021년 8월 31일 (현지 시각)캘리포니아 산 호세 연방법원에 출두하고있다./AP 연합뉴스

‘제2의 스티브 잡스’에서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 엘리자베스 홈즈 테라노스 창업자에 대한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국 CNBC는 “사기 등 12건의 혐의를 받고 있는 홈즈의 재판이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에서 배심원단 선정으로 시작됐다”고 31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재판은 실리콘밸리에 넘쳐나는 오만, 야망, 속임수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홈즈는 2003년 19세의 나이에 “혈액 한방울로 250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며 바이오 스타트업 테라노스를 창업했다. 홈즈는 명문 스탠퍼드대 중퇴, 금발(실제로는 갈색머리를 염색한 것),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앞세워 일약 실리콘밸리의 스타가 됐다. 스티브 잡스처럼 검은색 터틀넥 셔츠를 고집하는 그를 사람들은 ‘여자 잡스’라고 불렀다. 홈즈는 실제로 잡스의 식단과 생활패턴까지 그대로 따라할 정도로 잡스에 집착했다.

2009년 테라노스의 가치는 90억달러(10조4800억원)까지 치솟았고 이사회에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루퍼트 머독 같은 저명 인사들이 합류했다. ‘불가능한 기술’이라는 바이오 전문가들의 의견은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테라노스는 세이프웨이, 월그린 등 편의점에서 질병 진단 서비스를 시작했고 미 국방부는 군에도 테라노스 기술을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2015년 월스트리트저널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존 캐리루가 테라노스 전현직 직원 160명을 인터뷰해 진실을 폭로하면서 홈즈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캐리루는 홈즈가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공개한 테라노스의 기술이 모호한데다, 원리 설명 역시 고등학교 과학 수업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에 의심을 품고 취재를 시작했다. 수백명의 연구진과 직원들이 테라노스에 몸담으면서도 홈즈의 배경과 위세에 눌려 입닫았던 진실을 언론이 밝혀낸 것이다.

포춘지 표지에 사진이 실린 테라노스의 엘리자베스 홈즈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미식품의약국(FDA) 등이 조사한 결과 테라노스는 기술을 과대포장했을 뿐만 아니라, 성능 테스트에 다른 회사 제품을 이용하고 검사 결과를 조작하는 등 철저히 거짓으로 세워진 기업이었다. 수백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던 테라노스의 기기의 성능은 실제로는 10여가지 혈액검사가 가능했을 뿐이었다. SEC와 투자자들은 2018년 홈즈를 고소했다.

임신, 출산 등을 이유로 재판을 수년간 미뤄온 홈즈는 무혐의를 주장하고 있다. 회사 최고운영책임자(COO)였던 전 남자친구 라메시 발와니가 모든 일을 주도했고 자신은 그의 지시에 따라 얼굴마담 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는 발와니가 자신을 정신적·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주장도 담겼다. 또 기술력을 과시했던 본인의 과거 발언에 대해서는 “투자 유치를 위해 과장하는 실리콘밸리 관행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8월 31일 캘리포니아 산 호세 연방법정에 출두하는 엘리자베스 홈즈와 변호인들./AFP 연합뉴스

하지만 전문가들은 홈즈가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의료 사업에서 사기행각을 일삼은데다, 범죄를 입증할 증거가 많기 때문에 유죄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유죄가 확정되면 홈즈는 최대 20년의 징역을 살아야 한다. 이번 사건이 ‘남을 속이고 훔쳐서라도 성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실리콘밸리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NYT는 “우버의 트래비스 캘러닉, 위워크의 애덤 노이먼 등 수많은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이 각종 스캔들로 물러났지만 법적 처벌을 받은 경우는 드물다”면서 “누군가 사기를 저질렀을 때 기소하지 않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