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인종은 인도계다. 구글·애플·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에서 인도계 직원 비중은 전체의 30% 정도로 알려졌다. CEO 중에도 인도계가 많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어도비의 샨타누 나라옌, IBM의 아르비드 크리슈나, 마이크론의 산제이 메로트라 등이 CEO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한국인들도 조직 내에서 “정말 똑똑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실리콘밸리 마운틴뷰에 있는 구글 본사에만도 한국계 직원이 500여명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빅테크 직원은 “한국계가 늘어나면서 회사에서도 채용 시 한국계 비중을 고려한다”며 “한국인들이 워낙 똑똑해서 안 뽑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한국계는 주요 테크 기업의 CTO(최고기술책임자)나 CEO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실리콘밸리에서 투자하고, 일하는 한국인들에게 물었다. 모든 인도계와 한국계가 이렇다고 일반화할 순 없지만 주요 특징을 꼽아봤다.
◇네트워킹 기술의 차이
가장 큰 차이점은 언어와 네트워킹 기술의 차이점이다. 800여개의 언어와 2000여개의 방언이 존재하는 인도는 언어로 인한 혼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 공식 문서나 행사에 영어를 사용한다. 힌디어도 공식 언어지만 최근엔 영어 사용이 더 권장된다.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인도인들은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이는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인도계의 네트워킹 능력으로 이어진다. 미국에서는 일이 없는 주말에 비업무적으로 동료와 하이킹을 하거나 브런치를 먹으며 교류하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집으로 초대해 바비큐를 구워먹거나 칵테일 파티를 하며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인도계는 이러한 자리에 쉽게 녹아들며 대화에 적극 참여한다. 익명을 요구한 전 빅테크 직원은 “실리콘밸리에 있는 인도인들은 머리가 좋고 약간 뻔뻔하다고 볼 수도 있다”며 “눈치가 빨라 대화에 잘 끼어든다”고 했다.
한국계는 이러한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 손에 맥주병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야기하는 분위기와 ‘실없는 대화’에 익숙지 않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한 투자자는 “대개 한국계들은 연말 파티 등 많은 사람이 모인 네트워킹 자리에서 동료들과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다가 할 이야기가 떨어지면 구석으로 빠진다”며 “결국 한국계나 자리에 잘 못 낀 아시안끼리 모여 앉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전 구글 HR 비즈니스파트너인 황성현 퀀텀인사이트 대표는 “이러한 네트워킹 자리에서 미국계나 인도계들은 보통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다가 스포츠, 영화, 정치이야기를 거쳐 자신의 실패담이나 일탈했던 이야기를 하며 낄낄거리며 웃는다”며 “하지만 한국계는 그런 대화의 흐름과 스킬 부분에서 약하다”고 했다.
이러한 네트워킹 기술의 차이는 팀 융합력과 조직 장악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김범수 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 매니징파트너는 “다른 직원들이 볼 때 한국계는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지만, 혼자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며 “일을 잘하는 것과 진짜 팀원이 되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고 했다.
◇넘쳐나는 숫자가 파워로 연결돼
테크 기업 내 넘쳐나는 인도계 숫자도 인도계 CEO가 많이 나오는 한 배경이다. 테크 기업들은 인종별 직원 비중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인도계는 한국계보다 10배 이상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10명짜리 한 팀에 인도인이 3~4명 되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인원수만 많은 게 아니다. 인도계는 같은 인도계를 노골적으로 끌어준다. 이기하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대표는 “인도계와 이스라엘계는 같은 인종끼리 대놓고 밀어주고 끌어준다”며 “반면 한국계는 상대적으로 같은 한국계를 밀어주고 키우는 측면이 약하다”고 했다.
절박함의 차이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유학을 온다. 특히 인도계는 머리가 좋다면 어릴 적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박용민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장은 “인도계는 집안에 똑똑한 아이들을 호주나 캐나다, 미국으로 일찌감치 유학 보낸다”며 “이들이 성장하며 인도계 미국인이 돼 첨단 테크 수장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유학 온 인도계는 미국에 정착하는 비중이 높다. 중국인들과 일본인, 한국인들은 어느 정도 경험과 노하우를 쌓은 후 다시 본국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근엔 이러한 선택을 하는 중국인들이 크게 늘었다. 중국 내에도 텐센트, 알리바바 등 세계적 규모의 테크 기업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는 다르다. 첨단 기술이 탄생하는 실리콘밸리에서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도 인도에 돌아가 취업을 하거나 창업을 하기 쉽지 않다. 아직 인도 시장과 기업이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인도엔 아직도 신분제인 ‘카스트 제도’가 남아있다. 아무리 첨단 기술을 습득한 엔지니어라도 낮은 계급이라면 인도 내에서 정상적으로 사업하기가 불가능하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한인 스타트업 대표는 “스탠포드 학위를 마치고 인도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애들뿐”이라며 “나머지는 실리콘밸리 빅테크나 초기 스타트업에 들어가 승부를 본다”고 했다.
◇미덕이던 겸손이 리스크로
실리콘밸리에서는 한국계 특유의 겸손함이 약점으로 작용한다. 많은 외국 기업 문화와 마찬가지로 실리콘밸리에서도 ‘셀프 홍보’가 중요하다. 지나친 자기 홍보는 해가 되지만, 적절한 수준의 어필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다. 인도계는 이를 잘한다. 한 빅테크 직원은 “인도계 직원은 특유의 뻔뻔함이 있다”며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자기 공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반면 한국계는 그렇지 못하다. 이기하 대표는 “한국계는 일을 완벽하게 잘하지만 10을 하면 1을 했다고 말하고 나머지는 말 안 해도 알아줄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앞으로 한국계 테크 기업 CEO가 나올 수 있을까.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국인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봤다. 점차 미국식 네트워킹 문화에 익숙하고 영어도 원어민 수준으로 하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유의 성실함과 똑똑함을 바탕으로 하고 네트워킹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높인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