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하이퍼리즘 사무실에서 만난 오상록 대표가 가상화폐 운용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 대표는 “미국은 이미 기업이 가상화폐 거래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며 “국내서도 기관투자자가 쉽고 안정적으로 가상화폐 거래를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했다. /남강호 기자

“우리는 ‘가즈아!’(가상화폐 상승을 기원하는 말)를 외치는 회사가 아닙니다. 2018년 창업 이후 연평균 40% 수익률을 달성했지만 하락장에서도 고객의 돈을 잃지 않는 투자로 안정적인 운용 성과를 이어가는 것이 최우선 목표입니다.”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가상화폐 투자 열풍에 개미들만 올라탄 건 아니다. 국내외 기업 80여 곳을 고객으로 두고 수천억원 상당의 가상화폐를 위탁 운용하고 있는 스타트업도 있다. 한국 IT의 메카인 판교의 기업 경영자 사이에서 “이 회사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하이퍼리즘 얘기다. 올해로 설립 4년 차 가상화폐 투자신탁 회사인 하이퍼리즘은 최근 해시드(블록체인 투자사)·위메이드(게임사)·GS그룹과 미국 1위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 등에서 130억원 투자를 유치하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지난 7일 서울 관악구 사무실서 만난 오상록(31) 대표는 “이미 미국 최대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전체 거래 약 70%가 기관 투자자 거래일 정도로 기업의 가상화폐 투자가 활발하다”며 “국내 가상화폐 시장도 이 같은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판교 기업들이 가상화폐 맡기려 줄 서는 스타트업

가상화폐 시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상·하한가도 없다. ‘안정적 운용’ 자체가 쉽지 않다. 오 대표는 “우리가 설계한 알고리즘 봇(자동 프로그램)이 전 세계 수십 개에 달하는 가상화폐 시장 간 시세 차이를 이용해 쉼 없이 거래하면서 리스크를 줄이며 안정적인 수익을 낸다”고 말했다. 거래소마다 가상화폐 가격이 제각각인 점을 이용해 로봇이 쉼 없이 가상화폐를 거래하며 차익을 낸다는 것이다. 5월 한 달간 비트코인 가격이 36% 폭락했을 때도 하이퍼리즘의 알고리즘 봇은 손실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은 수학·물리·정보 올림피아드 메달리스트 출신들이 중심이 된 개발진이다.

서울대 경영대를 나와 사모펀드 운용사 도미누스인베스트먼트에 재직하던 오 대표는 2017년 말 국내 가상화폐 붐을 보고 창업을 결심했다. 그는 “개인뿐 아니라 기업이 대규모로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시대를 내다봤다”고 했다. 그가 처음 선택한 곳은 일본이었다. 명확한 가상화폐 규제가 없던 한국과 달리 2017년 가상화폐 규제를 도입한 일본에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해 불확실성이 적었다”고 그는 말했다. 오 대표는 일본 출장을 왔던 카카오 김범수 의장을 만나 사업을 설명했고, 김 의장이 흔쾌히 투자 약속을 하면서 이듬해 1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 “가상화폐 업계 골드만삭스 될 것”

사업 초기엔 가상화폐 거래소와 채굴자가 주고객이었지만 가상화폐 가격이 폭락하면서 하이퍼리즘도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2019년부터 기업 투자자들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오 대표는 “카카오와 라인이 자체 가상화폐를 발행하고 넥슨이 코빗⋅비트스탬프 등 가상화폐 거래소를 인수한 것이 변화의 기폭제였다”고 했다. 국내 IT 대기업들이 공식적으로 가상화폐를 발행하고 거래소를 사들이면서 기업 사이에서 가상화폐에 대한 관심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카카오의 투자 자회사 카카오인베스트먼트와 네이버의 손자회사 스프링캠프, VIP자산운용 등에서 후속 투자도 유치했다. 이후 판교 IT 기업들과 게임사들이 하이퍼리즘 고객이 됐고, 점점 소문이 나면서 IT 업종이 아닌 대기업들도 하이퍼리즘에 가상화폐를 위탁하기 시작했다. 오 대표는 “이때부터 가상화폐를 사기·도박이라고 생각하던 기업 오너와 경영진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가상화폐 시장은 정보 부족, 비싼 수수료, 수십 가지 각국 통화로 사야 하는 등 비효율이 커 개인에게 불리한 시장”이라며 “가상화폐 업계의 미래에셋⋅골드만삭스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