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메모리반도체 공장에서 직원들이 반도체 장비를 조작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생산 능력 확대를 위해 예산 6000억엔(약 6조2000억원)을 긴급 투입하기로 했다. 일본에 생산 시설을 짓는다면 일본 기업은 물론, 대만·미국 등의 회사에도 자금은 지원하겠다는 내용이다. 미국과 한국, 일본, 대만, 인도로 이어지는 ‘글로벌 반도체 안보 블록’이 더욱 공고해지는 양상이다.

24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다음 달 국회에 제출할 2021 회계연도(올 4월~내년 3월) 추경 예산안에 반도체 관련 예산 6000억엔을 특별 편성했다. 이 중 4000억엔은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TSMC가 일본 구마모토에 짓기로 한 반도체 공장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나머지 2000억엔은 미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과 일본 업체 키오시아홀딩스(옛 도시바 메모리)가 각각 히로시마(広島)와 이와테(岩手)에 짓는 반도체 공장에 투입될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공장 신설 비용의 50%를 수년에 걸쳐 보조하는 대신, 반도체 수급 상황이 악화될 경우 기업이 일본 정부의 증산 요구에 응하는 것을 지원 조건으로 내건 것으로 알려졌다. 일정 기간 공장 철수를 금지하거나 일본에서 생산된 반도체를 경우에 따라 일본에 우선 공급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는 일본이 국내 반도체 생산 역량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동맹국 간 연대와 협력을 강화하되, 되도록 자국 영토 안에 생산 시설을 구축하는 ‘반도체의 안보 무기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최근 자국 반도체 업체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10% 안팎까지 떨어지자 지난 6월 발표한 통상백서에서 반도체 산업 부활을 경제 안보 핵심 과제로 삼았다. 10년 안에 반도체 매출을 3배로 늘리고, 미국과의 기술 협력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15일 일본을 방문한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경제산업상과 회담을 갖고 반도체 공급망 구축 및 기술 협력을 핵심으로 하는 ‘미·일 상무·산업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미국도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대만, 인도와도 반도체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대만은 23일 화상으로 ‘경제 번영 동반자 대화(EPPD)’를 열고 반도체 등 핵심 산업 공급망의 병목 현상을 없애고 공급 안정성을 높이는 데 협력하기로 했다고 미국 국무부가 밝혔다. 양측은 또 “국제 규범에 어긋나는 경제적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중국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이날 밤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대만과 미국의 경제 협력은 멈출 수 없고 멈춰서도 안 된다”고 했다.

인도를 방문 중인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는 이날 슈리 피유시 고얄 인도 상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양국 간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인도는 일본, 호주와 함께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反中) 협의체 ‘쿼드(QUAD)’ 회원국이다. 공동성명에서 양측은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최신 기술의 중요성에 동의하고, 쿼드라는 체제 내에서 이러한 이슈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