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반도체 기업 인텔이 15일(현지시각) 온라인 행사를 갖고 향후 10년간 유럽에서의 반도체 개발과 생산을 위해 800억유로(109조6000억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작년 미 애리조나주와 올해 오하이오주에 각각 200억달러를 투자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를 포함한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 이후 내놓은 3번째 대규모 투자 계획이다.
한국의 삼성전자에 반도체 업계 매출 1위 자리를 내줬고, 컴퓨터 CPU(중앙처리장치) 시장에서도 AMD 등에 추격 당하는 인텔이 유럽에 대규모 투자를 하며 ‘왕국 재건’에 나섰다. 인텔이 유럽에 생산시설을 확대하는 이유는 한국의 삼성전자, 대만의 TSMC를 필두로 아시아에 편중된 반도체 생산 구조를 바꾸겠다는 전략이 유럽의 입장과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 부족도 인텔의 생산시설 확대의 주요 배경이 됐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현재 전 세계는 채울 수 없는 반도체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며 “세계가 더 디지털화될수록 반도체는 점점 더 핵심이 될 것이다. 우리는 유럽과 함께 역사를 쓸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에 170억유로 생산 시설 건립
후발 업체의 추격, 고객사의 이탈, 기술력 정체 등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인텔은 작년 2월 인텔 엔지니어 출신인 팻 겔싱어를 CEO로 앉히며 빠르게 변하고 있다. 작년 3월 ‘IDM(종합반도체) 2.0′이라는 전략을 발표했고 파운드리 서비스를 인텔 반도체 핵심 사업으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당시 갤싱어 CEO는 유럽에도 대규모 반도체 시설을 세우겠다고 밝혔고 1년여 동안 유럽 각국 정상들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다. 이번 투자 발표는 1년 간 다듬어온 인텔의 유럽 진출 전략이 구체화된 것이다.
인텔의 유럽 투자의 핵심은 독일 마그데부르크 지역에 170억유로(23조3000억원)를 들여 2개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것이다. 2023년 상반기 착공해 2027년부터 첨단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인텔은 반도체 공장 건설로 독일에 7000개의 건설 일자리가 생기고, 완공 후 3000개의 인텔 정규직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와 함께 인텔은 120억유로를 투자해 아일랜드 북동부에 있는 레익슬립 내 기존 공장을 2배로 확장하고, 프랑스 파리 인근엔 연구개발(R&D) 센터를 건설할 계획이다. 1000여명이 고용되는 이 센터에서는 인텔의 고성능컴퓨팅(HPC)과 인공지능 디자인 능력 향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인텔은 또 프랑스에 파운드리 디자인센터도 설립한다는 방침이다.
이탈리아와 폴란드 등에도 투자가 진행된다. 현재 인텔은 이탈리아 정부와 최첨단 반도체 패키징·조립 공장 구축을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다. 협상이 완료되면 45억유로가 투자될 예정이다. 폴란드에서는 기존 연구소를 50% 추가 확장하고, 스페인에서도 바르셀로나 슈퍼컴퓨팅 센터와 함께 공동 연구소를 세우고 고성능 컴퓨팅 관련 연구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겔싱어 CEO는 “인텔은 실리콘밸리에 실리콘(반도체)을 심었고,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에 실리콘 사막을 만들었다. 오하이오에는 실리콘 심장부를 만든다. 독일에는 여러 유럽 국가를 잇는 실리콘 교차로를 만들것”이라고 했다.
◇유럽과 손잡은 인텔
인텔은 지난 30여년간 유럽에서 사업을 전개하며, 유럽연합 전역에 1만여명의 임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가 국가 안보에 매우 중요한 측면으로 부각되면서 인텔은 유럽의 ‘니즈(필요성)’를 건드렸다.
최근 전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전 영역에서 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반도체가 국가 안보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많은 국가들은 반도체의 자국 내 생산을 중시한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EU)은 지난달 EU반도체칩법을 제정하고, 반도체 부문에 공공과 민간에서 430억유로(58조9000억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인텔은 대규모 반도체 제조 업체가 없는 유럽에 진출해 전 세계 반도체 제조 시장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겠다고 했고, 유럽연합의 지원을 따냈다. 유럽은 2030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20%를 차지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9%)의 2배다. 이날 인텔 발표에 등장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은 “인텔의 발표는 유럽반도체칩법의 첫번째 주요 성과”라며 “유럽은 비즈니스에 열려있다”고 했다.
이번 투자는 인텔 입장에서도 유럽의 첨단 기술과 고급 R&D 인력을 활용하고, 파운드리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다. 겔싱어 CEO는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유럽의 디지털 미래를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반도체 업계는 인텔뿐만 아니라 다양한 업체들의 대규모 투자가 진행 중이다. 앞으로 수많은 영역이 디지털화되면서 반도체의 수요는 더욱 커지고 관련 시장도 폭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규모는 작년보다 20% 성장한 1321억달러로 예상된다.
TSMC는 올해 작년보다 40% 늘어난 420억달러(52조3000억원)를 투자할 예정이다. 미국 글로벌파운드리는 1년 전보다 155% 증가한 45억달러(5조6000억원), 대만의 UMC는 1년 전보다 71% 증가한 30억달러(3조70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도 2030년까지 반도체에 17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미 텍사스에 20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