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의 중국 반도체 때리기가 가속화하는 가운데 삼성전자 등 한국 반도체 기업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중국 제재가 빠르게 한국 기업을 추격하는 중국 반도체 산업의 발목을 잡아 한국 반도체가 중국을 따돌리는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분투 중이다.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대중(對中) 제재 칼날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또 글로벌 경기 침체와 PC,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중국 제조 기업의 부진까지 겹쳐 삼성전자는 7일로 예정된 3분기(7~9월) 실적 발표에서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내놓을 전망이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지난달 28일 직원 간담회에서 “올 하반기 매출이 4월 전망치 대비 32% 낮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5일(현지 시각) “삼성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에 대한 야심 찬 투자와 반도체 산업의 정치화 추세는 장기적으로 삼성에 순풍(tailwind)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도체 정치화’ 위기이자 기회
중국은 국내 반도체 수출의 40%를 소화하는 ‘큰손’이다. 특히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SK하이닉스는 우시에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두고 있어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가 나올 때마다 사업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WSJ은 이를 두고 “반도체 산업의 정치적 속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은 삼성전자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다주고 있다는 게 WSJ의 분석이다.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 규제를 강화하려는 미 바이든 정부의 행보는 삼성을 비롯한 한국 업체들의 중국 공장 운영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YMTC처럼 급성장하는 중국 메모리 업체들의 성장을 막는 효과도 크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빠른 속도로 기술력을 쌓고 있는 중국 업체에 쫓기는 상황이다. 중국 업체들은 특히 기술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거세게 추격해오고 있다. 낸드플래시는 스마트폰·PC 등 전자기기에 탑재되는 데이터 저장용 반도체다. 고용량을 구현하기 위해 저장 공간을 마치 고층 빌딩처럼 높이 쌓는 것이 기술력의 한 척도로 평가받는다. 20년 연속 낸드 시장 1위인 삼성전자는 현재 176단을 양산 중이지만, 지난 8월 중국 YMTC는 232단 낸드를 개발했다고 발표하며 세계 반도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정부의 대규모 투자를 등에 업은 반도체 기업들은 막대한 적자 속에서도 수익성을 신경 쓰지 않고 사업할 수 있는 특수성이 있지만 최근에는 YMTC 반도체의 애플 아이폰 탑재설이 불거지는 등 기술력이 무섭게 성장하는 중”이라고 했다.
◇지정학적 위기 속 TSMC 추격하는 삼성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1위 대만 TSMC의 ‘지정학적 위기’도 삼성에는 반사이익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의 군사적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바이어들이 대안(代案)으로 업계 2위인 삼성전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4조원)를 들여 대규모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경계현 삼성전자 대표는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고객들이 (최근 지정학적 위기로) 테일러에 짓고 있는 새 공장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테일러 공장 때문에 더 열심히 파운드리 사업을 하자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제재와 지정학적 위기가 커지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통했던 중국에서 제조 업체들이 빠르게 이탈하는 ‘탈(脫)중국’ 현상도 가속화하고 있다. 실제로 애플은 협력사인 대만 폭스콘을 통해 중국에서 아이폰 등 주력 제품을 생산해왔지만, 최근 인도로 생산 거점을 분산시켰고 스마트워치 ‘애플워치’와 노트북 ‘맥북’ 생산도 베트남으로 옮기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도 스마트폰, TV, PC 등 중국 내 공장을 속속 접고 베트남, 인도 등으로 생산 거점을 옮기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 제조 기업의 영향력이 약화하면서 내수를 기반으로 성장해오던 중국 반도체 산업도 주춤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