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현지 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바르셀로나 수퍼컴퓨팅 센터’(이하 BSC). 성당을 개조한 센터 가운데엔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10m가 넘고 무게만 40톤에 달하는 거대한 수퍼컴퓨터 ‘마레 노스트롬4′가 미세한 진동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유럽 최고 수준 수퍼컴퓨터로 꼽히는 이 기기는 게놈(유전체), 천체 물리학, 양자역학 등 유럽 주요 연구기관의 빅데이터 분석을 주로 수행한다.

BSC는 10년 내 유럽산(産) 반도체로 수퍼컴퓨터를 자체 개발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이 컴퓨터의 핵심 부품은 인텔, AMD, 엔비디아와 같은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공급한다. 조셉 마르투렐 BSC 이사는 “수퍼컴퓨터, 자율주행 같은 미래 핵심 기술 인프라는 결국 반도체인데 유럽은 이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며 “자율주행차 시대에 자동차를 만들어도, 자율주행용 반도체를 만들지 못하면 산업의 근간을 외국에 내주는 셈”이라고 했다.

반도체가 핵심 안보 자산으로 부상한 가운데 유럽이 반도체 독자 생존에 나섰다. 유럽연합은 지난 2월 ‘ECA(European Chips Act)’라는 이름의 반도체 지원 법안을 발의했고, 연내 통과와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 법이 시행되면 민·관 합동으로 430억유로(약 60조원)의 기금을 조성하고, 반도체 설계·생산 등 유럽 반도체 산업에 전방위적으로 이 돈이 뿌려진다.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20% 이상을 달성하고, 최첨단 공정의 반도체 기술을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수퍼컴퓨팅 센터(BSC)에 있는 '마레 노스트롬 4'. 센터는 성당으로 쓰던 건물로, 이곳에 들어선 마레 노스트롬 4는 유럽 최고 수준 수퍼컴퓨터로 꼽힌다. BSC는 10년 내 유럽산 반도체로 차세대 수퍼컴퓨터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르셀로나 수퍼컴퓨팅 센터

◇“자체 CPU·GPU 만들자” 반도체 기업 30곳 뭉쳐

유럽엔 기초과학, 기술 강국(强國)들이 모여 있지만 유독 반도체 분야에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유럽은 세계 반도체의 20%를 소비하지만, 생산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세계 반도체 제조의 35%가 중국에서 이뤄지고, 이어 미국(19%), 대만(15%), 한국(12%), 유럽 순이다.

핵심 두뇌 반도체라고 할 수 있는 CPU(중앙처리장치), GPU(그래픽처리장치)는 미국 기업들이 기술을 독점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시장을 이끌고 있다. TSMC를 보유한 대만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뿐 아니라 설계, 후공정에도 강하다. 반면 유럽은 상대적으로 공정 난도가 낮은 차량용 반도체가 주력이다.

위기 의식을 느낀 유럽 내 30개 반도체·전자 기업은 EPI(유럽 프로세서 이니셔티브)라는 연합체를 구성해 자체 CPU와 GPU 개발에 나섰다. 3일 찾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스타트업 ‘세미다이내믹스’는 EPI에서 GPU 설계를 맡은 업체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반도체 설계 전문 박사 24명이 GPU 시제품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 회사는 EPI와 정부로부터 200억원 이상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2026년 첫 GPU 양산이 목표다. 루제 에스파사 CEO(최고경영자)는 “ARM과 같은 해외 반도체 특허 기업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오픈소스(공개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다”고 했다.

◇풍부한 원천기술 바탕, 대규모 투자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카탈루냐 주립 광학과학연구소(ICFO)는 첨단 반도체 연구 인력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ICFO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나현수 박사는 “현재 연구실에서 2나노(nm·1㎚는 10억분의 1m) 수준의 반도체를 개발 중”이라며 “연구실 출신으로 스타트업을 차려 양자컴퓨터용 반도체 양산에 뛰어든 동료들도 여럿”이라고 했다. 스페인 정부는 지난 5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120억유로(약 17조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했다. 현지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유럽 기업들의 핵심 기술 확보를 지원하는 동시에 한국 등 해외 반도체 기업의 공장을 유치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바르셀로나(스페인)=임경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