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현지 시각) 오후 미국 라스베이거스 한 호텔에서 열린 CES 2023 삼성전자 TV 신제품 사전 공개 행사장. 삼성은 80~110인치 초대형만 있던 최고급 ‘마이크로 LED TV’를 올해 처음으로 소비자가 많이 쓰는 50·60·70인치대로 크기를 다양화했다. 스스로 빛을 내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8K TV도 새로운 제품 대신 작년 제품에 크기를 다양하게 하고 일부 기능을 추가해 ‘2023년형’이란 이름을 붙였다. 행사장을 둘러본 취재진 사이에서 “올해 신제품이 유독 없다”는 평가가 나왔다. 수년 전 전시장을 가득 채웠던 삼성의 ‘미래 먹거리’ 로봇이나 메타버스(3차원 가상 세계) 관련 신제품도 올해는 자취를 감췄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작년부터 이어진 불황 여파 탓”이라며 “신제품을 내기보다는 기존 제품 성능과 종류를 강화하고 기기 간 연결을 강조해 판매를 늘리자는 것이 올해의 전략”이라고 했다.
◇불황 속 ‘뜬구름’ 기술보다 현실에 집중
올해 CES를 관통하는 화두는 ‘실용(實用)’이다. 그간 CES는 신기한 로봇, 하늘을 나는 자동차, 화면이 돌돌 말리는 1억원대 초고가 TV 등 화려하고 거대한 기술 비전을 과시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올해는 극심한 경기 불황 탓에 상황이 달라졌다. 전자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업계 전반적으로 매출과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대규모 감원(減員)을 하며 신사업까지 취소하는 홍역을 치렀다”면서 “뜬구름 잡는 기술만으로는 수익은 물론 투자조차 받기 어려운 형편이 된 만큼, 올해 유독 현실 가능성에 집중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LG전자 역시 신제품을 사지 않아도 구형 가전에 신기능을 계속 업그레이드해주는 새로운 개념의 ‘업(UP) 가전’을 이번 CES를 통해 미국 시장에 내놓는다. 업 가전은 지난해 국내에 출시해 불황 속에 소비자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작년 가을 선보였던 97인치 OLED TV도 올해 CES에 그대로 가져왔다.
유전자 기반의 암 치료, 신약 개발과 같은 먼 미래에 집중하던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도 최근 스마트 보청기, 혈당 측정기와 같이 당장 사용 가능한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 양대(兩大) 대체육 업체인 비욘드미트, 임파서블푸드도 올해 CES에 참가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인플레이션으로 업계가 위축되자 CES 참가를 취소했다.
◇자율주행 벽에 부딪힌 자동차 업체들도 선회
자율주행의 높은 벽에 부딪힌 자동차 업계도 이번 CES에서 먼 미래의 기술보다는 당장 실현 가능한 실용 기술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팬데믹 이후 자동차 업계는 공급망 혼란으로 공장을 수시로 멈춰야 했다”며 “실제 차를 생산하지 못하면 아무리 멋진 비전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동안 미래에 대한 비전은 나올 만큼 나왔고, 이제 비전을 현실화해야 하는 ‘기술 고도화’ 단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그동안 도심 항공기나 걸어 다니는 로봇 같은 미래 비전을 잇따라 공개해 왔지만, 이번에는 불참하고 대신 현대모비스가 참가해 양산 가능한 신기술을 집중적으로 선보인다.
해외 완성차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자동차가 나의 분신이 된다는 의미로 ‘아바타’라는 무인차 콘셉트카를 선보였던 메르세데스 벤츠는 최근 양산차에 적용한 반자율주행 기능인 ‘자동 차선 변경’ 기능과 차세대 충전 기능을 선보인다. 재활용 소재 자동차 등 꿈 같은 콘셉트카를 선보였던 BMW도 2025년부터 양산할 전기차 플랫폼 ‘뉴 클래스’를 소개할 예정이다. CES에 참가한 한 IT 업체 임원은 “불황인 것은 알지만, CES에서 먼 미래를 가늠할 만한 혁신이 사라진 것은 안타깝다”고 했다.
라스베이거스=류정·박순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