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용품 전문업체 라엘의 백양희 대표이사(CEO)가 서울 강남구 한국지사 사무실에서 자사 유기농 생리대를 소개하고 있다. 백 대표는 "미국에서도 여성이 창업하고, 경영을 계속 이어나가는 스타트업이 드물다"며 "직원 90% 이상이 여성이기 때문에 제품 개발 때 다들 사용해보고 의견을 낸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10년 전만 해도 방학 때 한국에 다녀오면서 트렁크 한가득 한국에서 파는 생리대만 채워오는 유학생도 있었어요. 미국 마트에서 파는 생리대는 소재가 안 좋은 데다 흡수력이 떨어지고, 포장지까지 조악했거든요. 한국 여성의 경험과 아이디어에다 한국 공장의 기술력을 합치면 미국 대기업 제품과 경쟁해도 승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여성 용품 ‘라엘’의 공동창업자 백양희 대표는 “K팝이나 K드라마만큼이나 K제조력도 경쟁력이 있다. 한국 생산을 고수한 덕분에 미국에서 빨리 품질을 인정받은 것 같다”고 했다. 라엘은 2016년 미국에 사는 한인 여성 아네스 안 크리에이티브 총괄책임자(CCO), 백 대표, 원빈나 제품 총괄책임자(CPO) 겸 한국지사 대표 3명이 창업한 유기농 생리대 브랜드다. 2017년 아마존에서 판매한 지 6개월 만에 유기농 여성용품 부문에서 판매량 1위를 차지했고, 3년 후엔 전체 생리대 부문 1위에 올랐다. CEO를 맡고 있는 백 대표는 서울대 경영대를 나와 미국에서 MBA 학위를 받은 뒤 디즈니에서 근무하다가 라엘 창업에 뛰어들었다.

미국에선 P&G와 같은 다국적 대기업이 여성용품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스타트업엔 진입 장벽이 높은 시장이었다. 10여 년 전부터 유기농 생리대를 만드는 작은 업체들이 있었지만 유기농 소재에만 치중한 나머지 흡수력이나 착용감이 좋지 않아 대중적인 성공은 하지 못했다. 이들은 사업 구상을 하기 위해 온라인에서 시험 판매한 여러 제품 중 유독 천으로 만든 생리대가 인기를 끄는 점에 착안했다. 라엘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유기농 순면 커버 인증을 받은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제품력은 한국의 생리대와 다름없는 제품을 내놨다.

세 사람이 창업하면서 한국 생산을 고집한 이유는 한국 생리대의 품질 때문이다. 백 대표는 “한국에 있을 땐 생리대 브랜드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만큼 소비자들의 기준이 높고 경쟁이 심한 시장이기 때문에 품질이 좋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세계 대부분의 여성용품 시장을 장악한 P&G와 킴벌리클락도 까다로운 한국 생리대 시장에선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정도다.

라엘은 창업 때부터 아마존을 공략했다. 아마존의 경쟁 제품 사이에서 눈에 띄기 위해 제품 사진과 광고를 외주 회사에 맡기지 않고 직접 고용한 사진기사와 디자이너가 만들도록 했다. ‘라엘’이란 브랜드 이름도 아마존의 구매자들이 ‘리얼(real)’을 ‘라엘(rael)’로 자주 오타를 낸다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은 것이다. 백 대표는 “아마존 구매자 후기가 곧 마케팅이고, 광고가 될 것이란 전략을 세웠다. 실제로 마트에 진출하거나 투자를 받을 때, 아마존 리뷰만 내밀어도 대부분 라엘의 경쟁력을 믿어줬다”고 했다. 아마존에서 성공을 거둔 후 라엘은 미국 대형 마트와 드러그스토어인 타깃, 월그린, CVS에도 입점했다.

라엘은 2018년 한국을 비롯해 유럽, 일본, 동남아 시장에 진출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유기농 화장품을, 한국에선 여성용 건강기능식품도 내놨다. 백 대표는 “한창 창업붐이 불 때 실리콘밸리에서도 여성 위생 용품을 만드는 스타트업은 없을 정도로 소외된 분야다”라며 “라엘은 생리대뿐만 아니라 여성 건강 전반을 아우르는 브랜드가 되는 게 목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