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3월 백악관에서 반도체 공급망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그로부터 1년 만인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미 상무부는 자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는 기업에 총 520억달러(약 68조원)의 지원금을 내걸고 구체적인 신청 절차와 지원 기준을 발표했다. /로이터 뉴스1

미국 정부가 반도체 기업에 520억달러(약 68조원)를 지원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이익을 미국 정부에 반납하고, 10년간 중국 내 시설 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미국의 경제 안보를 위해 보조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조치이지만, 초과 이익 공유부터 수익성 지표 제공, 반도체 핵심 공정 접근 허용 등 사실상 경영 기밀 공개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 탓에 반도체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미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총 520억달러 규모의 미 반도체 지원금 중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지급하는 390억달러(약 51조7000억원)에 대한 신청 절차와 기준을 발표했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향후 5년간 52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지원금을 마련했고, 이 중 390억달러는 생산 시설 투자에, 130억달러는 반도체 연구와 인력 개발에 지원할 계획이다. 미 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현재 미국 반도체 지원금을 기대하며 미국에서 진행 중인 생산 관련 신규 투자 프로젝트는 40여 개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미 텍사스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2조4000억원)를 투자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초과 수익은 반납하고 자사주 매입도 안 돼

미 상무부가 이날 발표한 반도체 지원금 신청 요건은 상당히 까다롭다. 기금지원공고(NOFO)에 따르면 반도체 지원금을 신청하는 기업은 현금 흐름, 내부 수익률, 수익성 지표, 예상 수익을 포함한 자세한 재무 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1억5000만달러(약 2000억원) 이상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예상을 웃도는 초과수익을 낼 경우 이를 미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 상무부는 “공유된 초과수익은 미국 내 반도체 생태계 강화를 위해 쓸 것”이라며 “수익 공유는 지원된 보조금의 75%를 넘지 않을 예정”이라고 했다.

미 상무부는 또 보조금 신청 시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을 향후 5년간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받을 계획이다. 시설 건설에는 적정 임금을 지급하는 현지 건설 노동자를 이용하고 미국산 철강, 건축 자재도 사용하도록 했다. 건설 및 공장 근로자를 위한 사내 보육 지원 계획도 제출해야 한다.

이미 예고된 대로 보조금을 받을 경우 향후 10년간 중국 또는 관련 국가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대하지 못한다. 상무부는 중국 관련 세부 규정을 이달 중순 다시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은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이 조건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여러 안전장치를 시행할 것”이라며 “우리는 백지수표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상무부는 지원하는 직접 보조금이 해당 사업 총 설비투자액의 5~15% 수준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투자 금액 170억달러를 감안하면 최대 25억5000만달러(약 3조3600억원)를 직접 보조금으로 받을 수 있다.

◇난감한 반도체 기업들...”미 당국과 협의 계속할 것”

미 상무부가 밝힌 반도체 지원금 지급 기준은 미국 내에서도 너무 까다롭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미 싱크탱크인 경제혁신그룹의 애덤 오지멕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뉴욕타임스에 “너무 많은 요건이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경쟁력 있게 만드는 것을 훨씬 어렵게 하고 있다”고 했다. 까다로운 요건으로 반도체 업체들의 미국 내 투자 열기가 식을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또 현금 흐름, 수익성 지표 등 회사 내부 기밀과 미국 국가안보기관에 미국 내 생산 시설에 대한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는 조항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반도체 핵심 공정 기술 등 경영 기밀까지 공개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수많은 제한 사항을 보면 미국 내 투자를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와 반도체 업체들은 미국 측과 협상을 지속하며 중국 투자 금지 등 세부 조건을 조율한다는 방침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기업 경영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미 관계 당국과 긴밀하게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