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성장과 함께 몸집을 키워왔던 실리콘밸리은행(SVB)가 10일(현지시각) 파산하면서 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업계에 연쇄 도미노 파산 우려가 증폭하고 있다. 이날 SVB의 모든 거래가 중단되면서 SVB에 돈을 맡긴 스타트업들은 예금 인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스타트업들은 직원 월급 줄 돈도 묶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미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 능력 부족을 이유로 SVB를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재인으로 임명했다. FDIC가 ‘산타클라라 예금보험국립은행’이라는 이름의 법인을 세워 SVB의 기존 예금을 이 은행에 이전하고, SVB 보유 자산의 매각도 추진하기로 했다. FDIC가 뒷처리를 맡는 것이다. FDIC는 오는 월요일(13일)부터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SVB는 미 16위 은행으로, 작년말 기준 SVB의 총자산은 2090억달러(276조5000억원), 총예금은 1754억달러(232조원)다.
◇위기 부상 이틀만에 파산
SVB는 1982년 설립된 미국의 은행이다. 실리콘밸리 중심부인 산호세에서 시작해 VC들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의 예금을 유치했다. 또 스타트업에 자금을 대출해주는 사업도 진행하며 큰 폭으로 성장했다. 2020~2021년 스타트업 업계에 투자금이 몰리면서 SVB의 예금 보유액도 커졌다. SVB는 미국 테크·헬스케어 스타트업 중 44%를 고객으로 보유하고 있다.
SVB의 위기는 하루 전 시작됐다. 9일(현지시각) SVB는 고객인 스타트업들의 예금이 줄어든 탓에 보유하던 매도가능증권을 어쩔 수 없이 매각했고, 이 과정에서 18억달러(2조4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봤다고 밝혔다. 전 세계 벤처 투자 시장이 차갑게 식으면서 스타트업들이 신규 투자를 받기 힘들어졌고 예금했던 돈을 찾아 쓰면서 SVB에도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SVB 주가는 하루 만에 60% 이상 폭락했고, 실리콘밸리 VC(벤처캐피털)들은 스타트업들에게 SVB로부터 돈을 빼라고 지시했다.
SVB는 증자와 지분 매각을 통해 22억5000만달러를 확보하겠다고 했으나 주가 하락으로 계획이 무산됐고 회사 매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스타트업들의 자금 인출이 줄을 이으며 ‘뱅크런’ 현상이 나타나자 캘리포니아 금융당국은 인수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빠르게 칼을 빼들었다.
◇패닉에 빠진 스타트업
SVB의 파산으로 월가는 긴장하고 있다. 스타트업들과 거래가 많은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가상화폐 업계와 거래가 많은 시그니처 은행은 주가가 장중 20% 이상 폭락했다.
하지만 대형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전반으로 위기가 확산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예상이다. 모건스탠리는 이날 “SVB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다른 은행들과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 스타트업 업계는 패닉에 빠졌다. SVB에 자금이 묶이며 재무 구조가 열악한 스타트업들이 줄도산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수많은 스타트업들은 SVB의 위기가 드러나자 예금을 빼려 했지만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SVB에 돈을 맡긴 고객들은 25만달러(3억3000만원)까지 예금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를 초과하면 자칫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SVB는 작년말 예금 보호 한도를 초과한 예금 규모를 1515억달러(200조4000억원)로 추정한다”고 보도했다. 총예금의 86%가 예금 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SVB의 총자산은 2090억달러로 전체 예금 규모보다 많다. 이 때문에 테크 업계에선 SVB가 보유한 자산을 모두 매각하면 고객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예금 보호 한도를 초과한 금액은 돌려받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테크 업계에선 이 기간을 6개월~1년으로 본다. 재무 구조가 취약한 스타트업은 이 기간을 버티지 못할 수 있다.
벌써부터 일부 스타트업들은 대금 납부가 지연되고 직원들의 임금 지급을 걱정하는 처지에 놓였다. HR플랫폼 리플링의 파커 코라드 CEO는 “은행의 지불 능력 문제로 인해 회사가 일부 고객들에게 대금 납부가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투자 회사 리퀴드스톡의 창립 파트너인 그레그 마틴은 “스타트업 절반 이상이 현금 대부분을 SVB에 보관하고 있다”며 “다음 주 수만명이 급여를 받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선 직원들의 임금을 주급이나 2주에 한번 지급한다. 한 스타트업 창업자는 “자금이 묶이며 어쩔 수 없이 해고를 추진할 수도 있다”고 했다.
고객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더 많은 구매를 요청한 스타트업도 있다. 테크크런치에 따르면 체험형 장난감 스타트업 캠프의 벤 카프만 창업자는 고객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우리 회사 현금 자산의 대부분은 SVB에 있다”며 “현 시점부터 판매되는 금액은 SVB가 아닌 체이스뱅크에 예치될 것이다. 운영에 필요한 현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IT 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비상장 주식을 담보로 잡고 임금 지급을 위한 현금을 VC들에게 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금 부족 폭풍우 몰아치나
테크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로 인해 스타트업들의 자금난이 심각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우려로 전 세계 벤처 투자 열기가 꺾이면서 스타트업들이 차츰 ‘돈맥경화’에 시달리고 있는데 스타트업 업계와 거래가 많았던 SVB가 파산하면서 보유한 자금이 묶이고, 추가 대출도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한 투자자는 “2021~2022년 초반 투자를 받았던 스타트업들이 자금을 소모하며 다시 펀딩을 받을 때가 다가오지만 여의치 않을 수 있다”며 “올 하반기부터 상당히 힘든 상황에 처하는 스타트업이 속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신규 투자 유치에 실패한 스타트업들은 SVB에서 자금을 대출했지만 이것마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피치북은 “2024년까지 스타트업들의 파산과 폐업 위기가 이어질 것”이라며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스타트업들의 폐업 비율이 극적으로 치솟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