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현지시각) 오전 8시 미 캘리포니아 샌타클라라에 있는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앞. 은행 개점 시간이 1시간이나 남았는데도 20여명의 고객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SVB 파산으로 돈을 물린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VC(벤처캐피털) 관계자들이다.
이들은 미 정부가 SVB의 예금 보호 한도를 넘어선 돈까지 보장하기로 하면서, 잃을 뻔한 돈을 보장받게 됐다. 파산 후 인출이 가능해진 첫날인 월요일 아침부터 나온 이들은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SVB의 파산 관재인인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직원이라고 소개한 한 직원은 본사 앞에 대기하던 취재진들의 질문을 받고 “비즈니스 애즈 유주얼(평상시와 다름없이 영업한다)”이라고 답했다. 고객들이 인출 제한 없이 평상시와 똑같이 원하는 만큼의 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SVB 본사에는 온라인뱅킹이나 폰뱅킹으로 인출 작업이 잘 되지 않은 고객들이 많이 찾았다. FDIC 측이 온라인뱅킹 등이 모두 가능하다고 설명했지만, 접속자가 몰리며 지연이 됐기 때문이다. 줄을 서고 기다리고 한 고객은 “온라인 접속을 시도했는데 접속 자체가 안 돼 직접 왔다”고 했다.
오전 9시가 되자 FDIC 관계자가 나와 고객들을 한번에 3명씩 은행 내부로 인도했다. FDIC 관계자는 고객들에게 현금 또는 수표, 다른 은행으로의 송금 등 3가지 업무옵션을 물은 뒤 답변에 따라 이들을 인도했다. 그 사이 대기 인원은 40여명으로 늘었다. 한번 은행 내부로 들어간 고객들은 대략 1인당 30분 가량 은행 업무를 보고 나왔다.
은행 업무를 마친 한 고객은 오른손에 수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예금했던 모든 돈을 찾았다”며 “인출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다”고 했다. 자신을 투자자라고 밝힌 한 고객도 은행에서 나와, “SVB와 25년간 거래했는데 폐쇄로 인해 충격을 받았다”며 “주말 간 돈이 묶여있어 마음을 졸였는데, 지금은 기분이 100% 회복됐다”고 했다. 마운틴뷰에서 스타트업을 운영한다는 한 CEO(최고경영자)는 “SVB에 수천억이 예금과 펀등 등으로 묶여 있었다”며 “15일이 직원 급여날인데 급여를 제때 줄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한편 이날 주가가 전날보다 61.83% 폭락하며 연쇄 부도가 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냈던 퍼스트리퍼블릭 은행은 평소와 다름 없이 한가했다. 실리콘밸리 곳곳에 있는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지점 앞엔 대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주가는 장 마감 후 시간외거래에서 15.35% 반등했다.
정부의 개입으로 SVB의 모든 예금이 보장받으면서 그간 출렁였던 가상화폐 시장도 안정을 되찾았다. 가상화폐 시장은 코인 1개당 미국 1달러와 연동한 스테이블코인 업체 서클의 자금 33억달러(4조3000억원)가 SVB에 묶이며 출렁였었다. 이날 미 서부 기준 오후 11시 기준 비트코인 개당 가격은 전날보다 8.53% 오른 2만4385달러를 기록했다. SVB 사태가 진정되고, 미 연방준비제도가 SVB와 시그니처 은행 파산의 여파로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번 SVB 파산이 스타트업들과 벤처캐피털들에게 치밀한 자금 관리의 필요성을 일깨웠다고 본다. 은행 계좌를 다양화하고 입금한 전액 보장되는 절차를 꼼꼼히 확인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날 SVB 앞에서 인출을 대기하던 한 고객은 “이번 사태로 나뿐 아니라 실리콘밸리 많은 사람이 절대 한 은행에 돈을 전부 집어넣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