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들에 수조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가로 반도체 기업의 핵심 기밀인 수율(收率·생산품 중 정상품 비율)과 생산량, 핵심 소재, 공장 가동률 등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지난달 반도체 보조금 신청 기준을 밝힐 때부터 현금 흐름, 내부 수익률, 수익성 지표, 예상 수익을 포함한 재무 계획서를 요구했다. 당시 ‘독소 조항’이란 지적이 미국 안팎에서 쏟아져 나왔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깐깐한 기준을 내놓은 것이다. 미 상무부는 27일(현지 시각) 반도체 기업 보조금 신청 절차를 안내하면서, 이 같은 민감 정보를 엑셀 파일 형태로 제출하라고 밝혔다. 사실상 반도체 생산과 공장 운용은 물론 회사 경영 전략에 대한 데이터를 모두 내놓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은 자국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는 삼성전자, 대만 TSMC 등을 상대로 오는 31일부터 보조금 신청서를 접수한다. 반도체 업계에선 “현실적으로 이러한 기밀을 전부 공개하긴 어렵다” “가뜩이나 미국 투자 매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미국 생산 기지 구축 계획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반도체 핵심 기밀, 민감 재무 정보 요구
미 상무부가 이날 요구한 정보에는 반도체의 원판인 웨이퍼(wafer) 종류별 생산량, 공장 가동률, 판매 가격, 수율 등이 포함돼 있다. 이뿐 아니라 공장 운영자, 생산 감독자, 엔지니어, 관리자 등 전체 직원의 유형과 급여, 기업 판관비, 마케팅 비용, 연구개발(R&D) 비용까지 요구했다. 모두 반도체 기업들이 철저한 대외비로 유지하는 내용들이다. 여기에 미 상무부는 내부 수익률, 부채 상환 지표, 반도체를 만들 때 사용하는 질소·산소·수소·황산 등 화학 소재와 기타 소모품 비용까지도 적도록 했다.
미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자국 보조금을 받은 반도체 기업의 초과이익을 추산해, 일정 부분을 환수할 방침이다. 상무부는 “보조금 신청 기업의 재정 상태는 반도체법 프로그램 심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제출하는 엑셀 파일은) 사업성, 재무 구조, 경제성, 위험을 평가하고 잠재적 지원금의 규모와 유형, 조건을 검토하는 데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상무부는 이에 더해 97쪽짜리 ‘노동력 개발 계획 지침’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면서, 현지 반도체 공장 직원들을 어떻게 고용하고, 교육하며 유지할지에 대한 계획도 밝히라고 요구했다. 앞서 보조금을 받으려면 보육시설을 지어야 한다고 내건 조건에 더해, 근로자들이 보육 시설을 중저가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도 담겼다.
◇반도체 업계 “현실적으로 수용 불가”
반도체 업계에선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들”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미국 정부가 수집한 삼성전자, TSMC의 핵심 기밀이 자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에 활용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현재 삼성전자와 TSMC는 7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m) 이하 최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정보는 그 자체로 핵심 기밀일뿐 아니라 이를 산출하는 것도 쉽지 않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과 TSMC가 공장을 건설하는 파운드리 분야는 고객사의 다양한 주문에 따라 수율이 제각각이라 이를 일일이 예측해 제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보조금 규모가 워낙 크고, 만약 신청하지 않으면 미국에 반기를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진퇴양난인 상황”이라고 했다.
국내 정·재계에선 미 정부가 연일 내놓는 무리한 반도체 정책에 자국의 정치 상황이 반영돼 있다고 본다. 내년 재선을 앞둔 바이든 정부가 세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한 까다로운 조건에다 각종 노동·교육 정책까지 집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현재 미국에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은 인플레이션으로 인건비, 건설 자재비가 급등하면서 대규모 적자 상태”라며 “이런 여건이 지속되면 보조금 신청 여부와 공장 완공 시기 등을 면밀히 재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