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반도체 지원금 지급 요건으로 기밀 정보 제출, 초과이익 환수 같은 독소 조항을 내걸었지만 전 세계 200곳 이상의 기업이 관심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 상무부 산하 반도체법 프로그램사무국은 17일(현지 시각) “지난 14일까지 200곳 이상의 기업에서 보조금 신청 의향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보조금을 받고 미국 내에 반도체 시설을 짓겠다는 기업들이 대거 몰렸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기업들이 무시하기 힘든 막대한 보조금 규모와 미중 갈등 같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보조금 신청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미 상무부는 미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5년간 총 527억달러(69조5000억원)를 지원할 계획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첨단 제조산업 육성을 목표로 추진한 반도체 지원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대규모 투자 유치로 이어지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했다.
◇독소 조항에도 200여 개 기업 몰려
미 상무부는 지난달 31일부터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려는 기업의 신청서를 받고 있다. 상무부는 본 신청서를 내기 21일 전까지 기업들에 보조금 신청 의향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는데 기업들은 건설하려는 시설 규모와 위치, 생산 능력, 생산제품, 투자 시기와 금액, 예상 고객 등에 관한 정보를 의향서에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상무부는 보조금 신청에 까다로운 조건을 걸었다. 미 안보국의 반도체 시설 접근을 허용해야 하고, 초과이익이 발생하면 미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또 기업들의 예상 수율(생산품 중 합격품 비율)과 생산에 사용하는 소재 같은 민감한 정보까지 엑셀 파일 형태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향후 10년간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거나 신축하지 않는다는 서약도 해야 한다. 반도체 업계는 이런 요구에 대해 영업 기밀 유출 가능성이 높다며 반발해 왔다. 미 상무부는 “(이번 의향서 접수 결과) 기업들이 여전히 미국에 계속 투자하기를 열망한다는 게 명백해졌다”며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내 추진하는 사업은 미국 35개 주에 골고루 분포됐고, 반도체 생태계 전체를 아우른다”고 했다.
의향서를 제출한 기업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현재 의향서 접수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미 텍사스 테일러에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는 “미국이 밝히기 전 먼저 확인해주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미국과의 ‘칩4 동맹’ 같은 안보적 상황을 고려할 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 반도체 보조금을 신청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반도체 업계와 한국 정부는 미국과 협상을 지속하며 독소 조항을 완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달 말 미국을 국빈 방문해 바이든 대통령과 이 부분을 논의할 계획이다.
◇늘어나는 미국 내 투자
반도체 업계에선 바이든 행정부의 보조금 정책이 효과를 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작년 8월 미 의회가 반도체 지원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과시킨 후 미국 내 반도체·클린테크 분야에 2040억달러(269조원)의 투자가 유치됐다. 이는 2021년 연간 투자액의 2배 수준이고, 2019년과 비교하면 20배 늘어난 것이다. 투자 규모 10억달러(1조3000억원)를 넘는 프로젝트는 2019년엔 4건에 불과했지만, 작년 8월 이후 현재까지 31건이 추진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신규 투자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외국에 본사를 둔 기업에서 나왔다”며 “한국, 일본, 대만에 본사를 둔 기업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미 행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뿌리며 아시아 동맹국 기업을 유치하고, 이를 통해 미국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컬렌 헨드릭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공급망 강화 속도를 시속 0㎞에서 100㎞로 단숨에 올린 것”이라며 “전례 없는 투자 규모”라고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미국의 정책이 자국우선주의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외국 기업들에 횡포를 부리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