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제재에 미국이 강력 반발하며 ‘반도체 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미 상무부는 21일(현지 시각) “중국의 근거 없는 제재에 단호히 반대한다”며 “주요 동맹국과 긴밀히 협력해 왜곡된 메모리 반도체 시장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을 향해 미국 편에 서라는 요구를 분명히 한 셈이다. 중국 외교부도 정례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이 나오자, “미국이 자신의 패권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대중국 수출을 제한하도록 협박하는 것”이라며 “결연히 반대한다”고 맞섰다. 미국의 요구를 듣지 말라는 뜻이다. 한국은 동맹과 시장의 갈림길에서 마이크론의 빈자리라는 ‘독이 든 성배’를 들게 됐다.
반도체 업계는 이번 제재를 두고, 중국이 철저한 계산을 토대로 7국(G7) 정상회의 폐막일에 미국을 정교하게 때린 ‘보복성 조치’라고 분석한다. G7이 전날 공동성명에서 대만·홍콩·티베트·신장·남중국해 문제에 직접 우려를 표명하는 등 강도 높게 압박하자 중국이 ‘거대 시장’을 무기로 맞서는 맞대응에 나선 것이다. ‘칩 워(Chip War)’ 저자인 크리스토퍼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는 “(중국의 제재는) G7 공동 노력에 대한 초기 시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中, 자국 산업 피해 적은 타깃 골라
중국은 이번 제재를 통해 자국 산업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제재 효과는 커보이는 치밀한 선전(宣傳) 전략을 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세계 3위 메모리 기업인 마이크론은 D램 시장에선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여전히 기술이 뒤처지지만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상당 부분 따라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중국에 반도체 공장도 두지 않아 중국 입장에선 큰 타격이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은 서구 첨단 기술에 접근하기 위해 미국 기업을 세게 때리는 것을 경계해왔지만,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만든 제품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기 때문에 (메모리 반도체는) 베이징의 손쉬운 목표였다”고 했다.
중국은 이번 제재를 ‘반도체 자립’의 계기로 삼겠다는 분위기이다. 오포·비보·레노버 등 IT 기기 제조 업체와 전기차 제조사들은 그간 마이크론 대신 중국 YMTC(양쯔메모리), CXMT(창신메모리) 같은 자국 기업 구매 비중을 빠르게 늘려왔다. 이번에도 ‘첨단 메모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구형 메모리는 중국 제품’의 투 트랙 전략으로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충분히 채울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기대감에 힘입어 22일 중국·홍콩 증시의 중국 반도체 기업 주가는 1~2%가량 일제히 상승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 SMIC를 비롯해 반도체 팹리스(설계) 기가디바이스, CPU(중앙처리장치) 전문 기업 인제닉 반도체 등이 고루 수혜를 입었다.
◇셈법 복잡해진 한국 반도체 업계
한국 반도체 업계는 셈법이 복잡해졌다. 미국 대표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빠진 중국 시장에서 수익을 거두는 것이 연일 동맹을 강조하는 미국의 기조와 배치되기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가 현실화하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미 상무부와 중 외교부는 제재 발표 이후 연일 한국을 향해 자국 편에 서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난감해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 정부가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의 중국 수출을 막는 것은 미 반도체법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이미 마이크론이 판매하던 것을 다른 나라 기업이 못 팔게 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면서도 “단순히 비즈니스의 문제가 아니라 외교·안보 문제가 된 만큼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만약 삼성·SK하이닉스가 중국 내 마이크론 물량을 대체하지 않으면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어 한국·미국에 모두 손해가 될 수도 있다.
대외경제연구원 연원호 경제안보팀장은 “중국은 준비만 되면 한국 반도체도 자국 제품으로 바꿀 수 있고, 그때는 미국 제재가 아니라 중국 정부 때문에 중국에 물건을 못 파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