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인 중국에 대규모 생산 기지를 구축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발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낸드) 메모리 생산의 40%를, SK하이닉스는 D램 생산의 40~45%와 낸드 생산의 2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 만에 미·중 무역 전쟁 등 외부 요인으로 인해 이 같은 ‘중국 편중’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위험 요소가 됐다.

그래픽=양인성·김현국·김성규

중국을 기회의 시장으로 여기고 투자에 나섰던 한국 기업 상당수가 수년째 중국 시장의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앞다퉈 대형 매장을 열었던 화장품과 유통업체들은 실적 부진에 신음하고, 배터리와 같은 최근 첨단 기술 분야에선 여전히 중국을 대체할 소재 공급망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게임 업체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허가를 내주지 않는 중국 당국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거대 시장이라는 이유로 대규모 투자에 나섰던 대가를 수년 뒤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기업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공장./삼성전자 제공

◇당시엔 생존을 위한 진출이었지만

중국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65%, 한국 반도체 수출의 55%를 차지한다. 대미(對美) 반도체 수출 비율(7%)의 8배에 달한다. 삼성은 2012년 시진핑 중국 주석의 고향인 산시성 시안을 반도체 거점으로 낙점하고, 70억달러(약 9조2700억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삼성의 해외 투자 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 SK하이닉스(당시 하이닉스)는 2003년 중국 진출 검토 당시, 미국 정부에서 징벌적 과세인 ‘상계관세’를 5년간 부과받은 상태였다. 채권단을 통해 정부 보조를 받았다는 이유였다. 생존 전략으로 택한 돌파구가 중국이었다. 중국 우시 정부는 공장 부지를 50년간 거의 무상으로 내주고 현지 은행 자금 조달까지 지원해줬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당시 우시가 지원책을 내놓지 않았으면 지금의 하이닉스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중 갈등 격화로 양사는 최악의 경우 60조원 이상 투자한 중국 공장 철수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다른 국가에 생산기지를 짓는다 해도, 중국 정부가 장비 반출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며 “수십조원이 추가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반면 미국의 메모리 기업인 마이크론은 미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중국(시안)에 11개의 생산기지를 분산 운용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해온 것이다.

◇지나친 중국 의존이 독 됐다

국내 화장품 업계를 대표하는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은 중국 시장에서 입지가 쪼그라들면서 실적이 급락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중국 바람을 타고 2016년 영업이익이 8500억원에 육박했지만, 지난해 영업이익은 4분의 1 토막 난 2100억원으로 급감했다. 해외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이 장기 코로나 봉쇄로 위축된 데다 ‘애국주의 소비’까지 겹치면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유통업체들도 대규모 중국 투자에 대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1994년 중국 진출 후 10조원 이상을 투자하며 백화점·대형마트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던 롯데는 한때 120개였던 매장이 롯데백화점 청두점 한 곳만 남아있다. 신세계도 이마트가 2017년 중국 진출 20년 만에 사업을 모두 철수했다. 국내 게임사들도 60조원에 달하는 중국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구조다. 하지만 한한령(限韓令·한국 제한)이 본격화한 2017년 3월 이후 해외 게임사에 내주는 ‘외자판호(게임서비스 허가권)’를 거의 받지 못했다.

자동차, 조선과 함께 우리나라 수출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이차전지는 광물 수입의 80% 정도를 중국에 의존하는 게 문제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차전지 양극재에 쓰이는 수산화리튬(84%), 수산화코발트(69%), 황산코발트(97%) 등을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다. 음극재에 쓰이는 천연흑연과 인조흑연의 중국 수입 비율도 70%를 웃돈다. 이차전지 수출이 현재는 호조를 보이지만, 중국의 원자재 공급망이 막히면 순식간에 산업이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