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괴짜들이 테크 기업을 이끄는 시대는 갔다.”
25일(현지 시각) 미국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가 예고한 ‘세기의 결투’에 대해 이렇게 썼다. 두 억만장자는 지난 22일 온라인 설전을 통해 근시일 안에 라스베이거스에서 ‘케이지 파이트(8각형 링 안에서 진행되는 격투)’를 하기로 했다. 예상되는 흥행 수입만 10억달러(약 1조3000억원) 이상이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사회성이 없고 사업 외에 최대한 말을 아끼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래리 페이지 등 과거의 은둔형 테크 아이콘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했다.
이른바 ‘일로니제이션(Elonization·일론 머스크화)’ 현상이 코로나 이후 성장이 정체된 실리콘밸리 빅테크 경영진 사이에서 유행처럼 확산하고 있다. 거침 없는 화법과 기이한 행동으로 대중 인지도를 높이고, 리더십을 굳혀 독단적인 결정으로 회사를 이끄는 방식인 것이다. 현지 테크 업계 관계자는 “어려운 시기에 리더십을 공고하게 하려면 경영자의 인기가 유지되어야 한다”며 “머스크 스타일 리더십을 경영자들이 모방하면서 실리콘밸리 테크 아이콘의 이미지가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관종’이 된 테크 거물들
24일 워싱턴포스트는 “2만명이 넘는 대규모 해고를 단행한 저커버그가 다시 ‘쿨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일론 머스크를 따라하고 있다”고 했다. 저커버그는 최근 운동에 심취하는 사진을 공개하며 강인한 이미지를 쌓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난달 저커버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한 주짓수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을 올렸다. 또 약 9kg의 조끼를 입고 장거리 달리기와 팔굽혀펴기 등 고강도 운동을 쉬지 않고 끝내는 ‘머피 챌린지’를 마쳤다는 글을 올렸다.
빅테크 CEO들은 앞다퉈 머스크와 저커버그의 싸움에 말을 보태고 있다. 과거 보디빌더, 역도 선수 경력이 있는 브라이언 체스키 에어비앤비 CEO는 “나는 테크 업계에서 이런 물리적인 전투가 벌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며 “나는 테크계의 리더들에게 벤치프레스 결투를 신청하겠다”고 했다. 댄 슐먼 페이팔 CEO 역시 수년째 이스라엘 군대에서 시작된 격투기 ‘크라브 마가’를 배우는 사진을 대중에 공개하고 있다.
재산을 과시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 23일에는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가 올 초 구매한 5억달러짜리 초호화 요트 ‘코루’에 첫 승선한 모습이 포착됐다. 이날 함께 탑승한 약혼자의 30캐럿짜리 초고가 다이아몬드 반지도 화제가 됐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아마존은 코로나 이후 2만7000명 규모의 역대급 감원을 했다”며 “회사 상황을 불안하게 보는 주주들과 관계자들에게 건재함을 과시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 초부터 테크 산업을 뒤흔든 생성형 AI ‘챗GPT’를 만든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월드 투어로 빠르게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한국·일본 등 세계 각국 정상들과 만남을 이어가며 AI 산업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전략이다.
◇CEO들, 머스크식 ‘경영 효율화’가 목표
전문가들은 “머스크식의 ‘관종’ 전략을 따라하는 실리콘밸리 CEO들이 궁극적으로 배우고 싶어 하는 건 머스크의 효율적 경영 방식”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트위터를 인수한 뒤 인원의 75%를 감원하고도 서비스가 정상 운영되는 상황이 CEO들에 경종을 울렸다는 것이다. 세일스포스의 마크 베니오프 CEO는 지난 3월 인사이더 인터뷰에서 “실리콘밸리의 모든 CEO가 머스크를 보고 내 안에 있는 머스크를 풀어줘야 할지 자문했다”고 했다.
실제로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스티브 허프먼 CEO는 “머스크의 트위터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적은 규모의 인원이라도 좋은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레딧은 지난 6일 회사 직원의 5%를 해고하기로 했고, 트위터처럼 급진적인 유료화 전환에 나섰다. 저커버그 역시 머스크식 경영에 대해 “회사 내 엔지니어와 관리 계층의 거리를 줄이는 좋은 변화”라고 평가했다. NBC는 “(감원으로 직원 불만에 시달려온) 테크 CEO 들은 머스크식 철권 통치를 칭찬하고 있고, 감탄이 모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