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로 여겨져 왔던 일본 스타트업 시장이 급부상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스타트업을 국가 성장 동력으로 지목하고 전폭적인 지원에 나선 것이 마중물이 됐다. 은행 등 기관들도 잇따라 투자 계획을 내놓으며 신사업으로 자금이 몰리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서 실리콘밸리를 비롯해 스타트업 업계에선 돈줄이 끊겼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일본은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우체국은행인 유초은행은 지난달 “전국의 신생 스타트업에 1조엔(약 9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3대 메가뱅크 미즈호파이낸셜그룹도 지난 20일 “100억엔(약 909억원) 규모 펀드를 1차로 조성해 스타트업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의 분위기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지난 16일 지난해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일본 공무원 수가 전년 대비 4배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닛케이는 “엘리트 공무원의 스타트업 이직은 일본의 성장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정부가 나서자 돈이 돈다
기시다 총리는 취임 직후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스타트업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스타트업 투자 규모를 2027년까지 10조엔으로 10배 이상 늘리는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일본 스타트업 투자 유치 실적은 지난해 기록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일본 스타트업은 지난해 8774억엔(약 8조원)을 조달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10년 전인 2013년(877억엔)에 비해 약 10배에 이르는 규모다. 일본 스타트업 플랫폼 이니셜 엔터프라이즈는 지난 1월 “일본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VC 펀드가 지난 3년간 40% 가까이 성장했다”고 밝혔다.
일본은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3위 경제 대국이지만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의 스타트업)은 아직 6곳에 불과하다.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기준 유니콘은 미국에만 656개, 중국 171개, 한국 14개다. 쓰요시 이토 비욘드 넥스트 벤처스 최고경영자(CEO)는 “일본은 다른 나라보다 유니콘 기업 수가 적고 스타트업 투자액도 적은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성장 기회가 많고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창업에 소극적이던 일본은 2016년 무렵 가상화폐 확산을 계기로 스타트업 육성이 활발해졌다. 일본은 한때 전 세계 비트코인 시장에서 엔화 점유율이 60%에 이르렀을 정도로 가상화폐 거래가 활발한 국가다. 일본 정부도 이에 맞춰 가상화폐 규제를 풀면서 산업을 육성했다. IT 산업에서 미국, 한국 등에 뒤처졌지만 블록체인, 가상화폐로 대표되는 웹 3.0 시장에선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스타트업 창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재·장비 등 일본이 강점을 가진 분야로 창업 열풍이 확산되는 모양새이다. 투자 업계 관계자는 “과거 일본 경제 부흥기를 이끈 건 소니, 혼다 같은 창업 기업이었다”며 “핀테크와 첨단 과학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일본을 다시 창업 국가로 이끌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분위기가 강하다”고했다.
실제로 태국 등 신흥시장에 진출한 일본 핀테크 스타트업 오픈(Opn)은 지난해 6월 일본 최대 은행인 미쓰비시UFJ 금융 등으로부터 1억2000만달러 규모 투자를 유치하면서 유니콘에 합류했다. 자금력을 바탕으로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머천트E’를 500억엔에 인수하는 등 빠르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일본 스타트업의 해외 기업 인수 금액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세계 최초로 인공 합성 단백질 소재를 개발한 바이오 스타트업 스파이버도 2021년에만 143억엔 규모로 투자를 받으며 유니콘에 올랐다.
◇한국 기업도 한일관계 순풍 타고 일본으로
한국 기업들도 일본 진출에 적극적이다. 지난달 도쿄에서 국내 스타트업을 일본 시장에 소개하는 ‘재팬부트캠프’를 개최한 스타트업얼라이언스 관계자는 “행사에 참가할 스타트업 10곳을 선발했는데 80곳 넘게 지원했다”고 말했다. 국내 생성형 AI 스타트업 뤼튼테크놀로지는 지난 4월 처음으로 일본에 진출했고 라인과 야후재팬 등을 자회사로 둔 일본 기업 Z홀딩스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자율주행로봇 전문기업 로보티즈도 지난달 일본 시장에 진출해 호텔을 대상으로 실내 자율주행 로봇 ‘집개미’ 운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