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바이오 강국’으로 올라서고 있다. 최근 알츠하이머 치료제와 코로나 첨단 백신 등 부가가치가 높은 신약의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미국·유럽과 함께 글로벌 바이오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일본 바이오 기업 에자이는 미국 바이오젠과 공동 개발한 알츠하이머 치료제 신약에 대해 지난달 미국에 이어 21일 일본에서도 판매 허가를 받았다. 지난 7일에는 다이이찌산쿄가 일본 후생노동성으로부터 mRNA(메신저 리보핵산) 코로나 백신 판매 승인을 받았다. 일본은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번째로 mRNA 백신 상용화에 성공한 국가가 됐다.
일본은 최근 5년(2017~2021년) 동안 최대 바이오 시장인 미국에서 6개의 혁신 신약(세계 최초 개발한 의약품) 판매 허가를 받았다. 전통 강국인 미국(66개), 유럽(25개)에 비해 아직 작은 규모지만 아시아 국가 중에선 가장 많다. 한국은 아직 혁신 신약이 없다. 다케다의 유전성 혈관부종 치료제 ‘탁자이로’를 비롯해 현재 판매되는 일본산(産) 블록버스터 신약(연 매출 1조원 이상의 의약품)만 10개가 넘는다. 제약 업계 관계자는 “일본 바이오 산업은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나려는 일본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고 있다”고 했다.
◇복제 불가능한 신약 쏟아내는 日
일본 바이오 산업의 경쟁력은 다른 기업들이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운 고부가가치 원천 기술에서 나온다. 성분만 분석하면 똑같은 의약품을 합성할 수 있는 화학 의약품과 달리 바이오 신약은 제조 과정이 복잡하고, 노하우가 중요하기 때문에 복제약을 만들기 어렵다. 특히 바이오 신약 원천 기술은 다른 치료제 개발에 응용하기 쉽다. 다이이찌산쿄가 상용화한 mRNA 백신이 대표적인 사례다. mRNA는 인체에 단백질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설계도’ 역할을 하는 유전 물질이다. 목표 질환에 따라 염기 서열만 바꾸면 암 환자를 위한 맞춤형 백신·치료제도 개발할 수 있다. mRNA라는 신약 플랫폼 기술을 확보하면서 차세대 신약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이다.
일본이 강점을 가졌던 제조업 기술도 ‘재팬 바이오’의 원동력이다. 일본 제조 산업은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제조 문화)’라 불릴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자랑했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대만 등에 밀려 몰락했다. 하지만 그 기술은 계속 살아남아 바이오 의약품 개발에 활용되고 있다. 카메라 필름 업체였던 후지필름은 필름 제조 기술을 활용해 노화 방지 의약품을 만드는 바이오 기업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기준 글로벌 바이오 위탁 생산(CDMO) 시장 4위 기업이기도 하다. 바이러스를 걸러주는 바이오 필터 분야 강자 아사히카세이도 원래는 세계 1위 이차 전지 분리막 생산 업체였다.
AI·로봇 등 첨단 기술 활용도 활발하다. 바이오 기업 아스텔라스는 인공다능성줄기세포(iPS)를 배양하는 양팔 로봇을 도입했다. 실험실에서 사람 대신 24시간 신약 개발을 할 수 있다. 다케다약품공업은 최근 도쿄에서 의약품을 로봇으로 배송하는 시범 사업을 시작했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화학 의약품 기술력에 제조업 노하우가 더해진 것이 일본 바이오 산업의 강점”이라며 “미국보다 mRNA 백신 개발을 늦게 시작했지만 2조원의 예산을 쏟아붓고,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등 일본 정부도 바이오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 끝나자 백신도 접은 한국
반면 한국은 첨단 바이오 시장에서 존재감이 미미하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다른 기업이 개발하지 않은 최초의 혁신 신약을 만든 적이 없다. 코로나 백신·치료제에서도 부진하다. 제약사들이 주축이 돼 결성된 ‘차세대 mRNA 백신 플랫폼 기술 컨소시엄’은 코로나 백신 후보 물질 개발에 성공했지만 임상 1상도 끝내지 못했다. 다른 바이오 기업들의 mRNA 백신 개발도 코로나 종식과 동시에 정부 지원이 축소되면서 흐지부지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오 육성을 위해 추진했던 총리 직속 ‘제약바이오컨트롤타워’는 올 하반기 중 출범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관련 부처 간 힘겨루기로 인해 구체적인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