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을 일으킨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글로벌 투자자와 기업을 한데 모아 ‘AI 제국’을 건설하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무려 7조달러(약 9300조원)를 투자받아 자체 AI 반도체 생산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심화되는 반도체 자국 우선주의와 규제를 뛰어넘어 AI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 올트먼의 구상이다. 가장 앞선 AI 소프트웨어 역량을 보유한 오픈AI가 자사 서비스의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AI 반도체 생산 능력까지 갖추게 될 경우 ‘일반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모든 곳에 두루 쓰이는 AI)’의 등장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9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올트먼이 자사 AI 개발에 쓸 반도체를 직접 조달하기 위해 5조~7조 달러 규모의 투자금을 유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7조 달러는 현재 글로벌 기업 가치 1, 2위 기업인 마이크로스프트(3조1249억 달러)와 애플(2조9162억 달러)의 시가총액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규모로, 기업 사상 전례가 없는 천문학적 투자금이다. WSJ는 “올트먼은 이를 통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재편하려고 한다”고 했다. 현재 미국 엔비디아와 AMD 등 극소수 기업들이 독점하고 있는 AI 반도체 시장의 구도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올트먼의 구상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에도 새로운 기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 기반이 없는 오픈AI가 AI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대만 TSMC와 삼성전자 같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와의 협업이 필수적이다. 또 AI 반도체에 들어가는 고사양 메모리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양분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AI 반도체는 기존 반도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가가치가 높다”면서 “올트먼의 구상이 현실화되면, 누가 핵심 파트너가 되느냐에 따라 반도체 업계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세계 반도체 시장은 5270억 달러(약 701조 원) 규모였다. 업계에서는 2030년이 되면 이 시장이 1조달러 수준까지 커질 것으로 본다. 이런 상황에서 5조~7조 달러의 투자금을 모아 AI 반도체 생산망을 구축하겠다는 샘 올트먼 오픈AI CEO의 구상은 반도체 업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조대곤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허황돼 보이는 수치지만 수많은 스타트업을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기업)으로 만들고, 챗GPT를 선보인 올트먼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면서 “이해관계가 맞는 민간 플레이어들의 협력이 각국이 내걸고 있는 보조금보다 반도체 산업을 더 제대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올트먼의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9300조 투자 유치 나선 올트먼
AI 반도체는 올트먼이 구상하고 있는 ‘AI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프라다. AI의 학습과 운용을 실현하는 반도체가 부족하면 아무리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머리를 맞대도 AI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지난 한 해 동안 글로벌 기업들은 물론, 각국 정부까지 나서 군비 경쟁을 하듯 AI 반도체 사재기에 나선 이유다. 올트먼은 이 같은 ‘AI 반도체 부족’이 더욱 극심해질 것으로 보고, 현재 시장을 장악한 엔비디아나 AMD 같은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직접 반도체 생산에 뛰어들었다. 특히 올트먼은 다양한 목적으로 쓰이는 현재의 범용 AI 반도체 성능이 오픈AI가 궁극적으로 개발하려는 ‘일반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모든 곳에 두루 쓰이는 AI)’ 연구에 충분치 않다고 여러 차례 비판해 왔다.
WSJ에 따르면 올트먼은 반도체 자체 조달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아랍에미리트의 셰이크 타흐눈 빈 자예드 국가안보 고문을 만났다. 중동 ‘오일 머니’를 주요 자금줄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지난해에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여러 차례 만나 사업 구상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 TSMC와 수차례 접촉했으며, 올 1월에는 한국을 방문해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와 반도체 협력을 논의했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핵심 기업들을 모두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파운드리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올트먼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WSJ는 소식통을 인용해 “올트먼은 수년 안에 10여 개의 반도체 생산 시설을 건설하고, 운영을 TSMC에 맡기는 계획도 수립했다”고 했다. 하지만 TSMC가 미국과 대만 공장 건설과 가동 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TSMC의 유일한 경쟁자인 삼성전자에도 기회가 충분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구상이 현실화되면 미국 기업이 중동·일본의 글로벌 자금을 토대로 고성능 AI 반도체 설계를 주도하고, 대만·한국 기업이 제조를 맡는 ‘글로벌 원팀’이 구성될 수 있다.
◇실제 실현 여부는 미지수
다만 전문가들은 “올트먼의 사업이 얼마나 투자자에게 매력적일지는 미지수”라고 평가한다. 각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AI 반도체가 다양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오픈AI용 반도체를 우선적으로 만들려는 올트먼의 구상은 시장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기존 AI 반도체 업체들도 대응에 나섰다. 9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기업·사업 분야별로 필요한 AI 반도체를 맞춤형으로 설계해주는 사업부를 구축하고 있다. 올트먼이 불만을 가졌던 범용 AI 반도체의 부족함을 맞춤형 사업으로 보완해 주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구글, 애플, 아마존 같은 AI 반도체 시장의 큰손들이 자체 반도체를 이미 개발하고 있는 것도 올트먼의 사업 구상에 걸림돌”이라고 했다.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미국 정부가 동아시아와 중동까지 끌어들인 올트먼의 구상을 허가해 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WSJ는 “그의 야망을 실현하려면 미 정부의 동의가 필요한 것은 물론, (이해 관계가 다른) 글로벌 투자자와 업계 관계자를 설득하는 데도 성공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