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말레이시아가 새로운 반도체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지정학적 위험이 낮은 말레이시아에 투자를 확대하고 공장을 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1일(현지 시각) “말레이시아가 미·중 반도체 전쟁의 깜짝 승자”라며 “말레이시아 북부 페낭주에 지난 18개월 동안 기업 수십 곳이 법인을 설립하거나 확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표적으로 미국 마이크론과 인텔, 독일 인피니언 등이 있다.
인텔은 올해 말 완공 예정인 3D 고급 패키징 공장을 포함해 말레이시아에 70억달러(약 9조20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페낭에 두 번째 조립 및 테스트 시설을 세웠고, 독일 인피니언은 앞으로 5년간 54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반도체 생태계가 잘 조성된 점도 기업들이 말레이시아를 선호하는 이유다. 인텔은 1972년 미국 외 지역으로는 처음으로 말레이시아 페낭에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 AMD, 일본 르네사스 등 글로벌 기업들도 이곳에 모이며 ‘동양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렸다. 그 결과 말레이시아는 세계 6위 반도체 수출국이 됐다. 매년 미국이 수입하는 반도체의 20%가 말레이시아에서 생산된다. 한국·대만·일본보다 높은 수치이다. 특히 말레이시아는 글로벌 패키징, 조립, 테스트 시장의 13%를 차지하며 반도체 후공정에 강점이 있다.
글로벌 고객사를 둔 중국 기업들도 미국의 제재를 피하려 말레이시아에 몰리고 있다. 제재가 시작되기 전 페낭에 16개였던 중국 기업은 현재 55개로 급증했다. 화웨이의 전 계열사인 엑스퓨전은 현지 업체인 네이션게이트와 제휴해 그래픽처리장치 서버를 제조하는 등 제재를 우회하는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피할 수 있다는 점도 업체들이 말레이시아로 이전하는 이유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