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DS(디바이스설루션) 부문장을 전영현 부회장으로 전격 교체한 것은 “삼성전자의 고조된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연말이 아닌 비정기 인사로 반도체 부문 수장만 인사를 냈기 때문이다. 삼성 반도체 위기감의 근원은 세계 1위인 메모리 반도체에서마저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밀리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DS 부문에서 15조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하자, 연말 인사에서 경계현 사장 교체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황이 회복되면서 유임됐다. 하지만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인 HBM의 엔비디아 납품이 예상보다 계속 지연되면서 삼성전자 내부에서 위기감이 고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진행 중인 엔비디아 HBM 검증 통과가 늦어지는 것이 인사에 결정적이었다”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메모리 경쟁력 되찾을까
삼성전자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메모리 분야에서 30년 넘게 1위를 지켜왔다. 하지만 AI 반도체 핵심 부품인 HBM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2013년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한 뒤, 4세대인 HBM3를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큰손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3월 5세대인 HBM3E도 양산에 들어가며 엔비디아에 납품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2세대(HBM2)까지는 세계 최초 양산에 성공하긴 했지만, 2019년 HBM 개발팀을 축소하며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뒤늦게 HBM 전담팀을 꾸렸지만 엔비디아 검증이 늦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의 주력인 메모리에서 SK하이닉스에 번번이 밀리면서 메모리 격차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이번에 SK하이닉스를 넘어서지 못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DS 부문장 인사는 승진 인사가 아닌 이미 반도체 사업부를 거쳐갔던 부회장의 복귀 인사였다. 이날 김용관 삼성메디슨 대표(부사장) 역시 삼성전자 사업지원TF 반도체 담당으로 배치됐다. 김 부사장은 삼성 미래전략실 전략1팀에서 반도체 투자 등을 담당한 바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경쟁력 복구를 위해 노련한 반도체 전문가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위기에 반도체 전문가 등판
삼성전자는 위기 때마다 충격요법을 통해 위기를 돌파해 왔다.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가 호황인 시절에도 조직에 위기의식을 주입했다. 이 회장은 “5년, 10년 뒤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메모리 1위에 안주하며 전반적으로 위기 의식이 떨어진 상황에서 인사를 통해 충격요법을 준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반도체 부문에서도 ‘발탁 인사’로 위기를 극복했다. 외환 위기였던 1997년 진대제 당시 부사장을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를 담당하는 시스템LSI 대표이사에 임명했다. 경제는 어려웠지만 메모리보다 더 큰 시장인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황창규 전 사장은 2000년 메모리사업부 사장을 거쳐 2004년 반도체 총괄 사장이 됐다. 황 전 사장은 후발 주자였던 삼성의 낸드 플래시 메모리 사업을 세계 1위로 올려놨다. 2008년부터 반도체 사업부 사장을 맡은 권오현 전 회장은 반도체 기업들의 D램 가격 인하 경쟁이 벌어진 ‘치킨 게임’에서 선전했다는 평가다. 다수의 기업이 파산했지만, 삼성전자는 D램 1위 기업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