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이 스마트폰의 두뇌로 통하는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설계의 선두 주자 ‘ARM’의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적자로 돌아선 실적과 구조 조정에 이어 ARM 지분까지 모두 정리하자 인텔의 위기가 예상보다 더 심각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상 최대 위기를 맞으면서 인텔의 주가(13일 기준 20.47달러)는 한 달 새 40% 넘게 하락, 27년 전 수준(1997년 초 20.28달러)으로 후퇴했다. 창업자 고든 무어를 비롯해 반도체 전문가들이 이끌었던 인텔이 마케팅과 재무 전문가 출신 CEO(최고경영자)들을 거치면서 기술 주도권을 점차 잃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존 주력 제품에 안주하며 새로운 기술 혁신에 실패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재무·마케팅 전문가들이 기회 놓쳐
13일(현지 시각)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인텔은 이날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서류를 통해 “ARM 주식 118만주를 더 이상 보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블룸버그는 인텔이 이번 매각으로 1억4700만달러(약 2000억원)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갖고 있던 주식만 처분한 게 아니다. 인텔은 지난 1일 실적 발표 직후 전체 직원의 15%에 해당하는 1만5000명을 감원하고, 배당금도 오는 4분기부터 중단한다고 밝혔다. 지난 2분기 16억1000만달러(약 2조200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 전년 동기 14억8000만달러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선 여파다.
1970년대 후반부터 50년 가까이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장악했던 인텔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이른바 ‘윈텔(윈도+인텔)’ 동맹을 맺고 ‘인텔 인사이드’라는 슬로건으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지배해왔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에도 컴퓨터 시장에 안주하면서 스마트폰 등 모바일 중심의 산업 구조 변화를 간과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인텔은 모바일 반도체 수요를 놓친 데다, 이제는 AI(인공지능) 반도체 칩 시장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했다.
테크 업계에서는 이 같은 위기가 마케팅과 재무 전문가 출신 CEO들이 인텔을 이끌면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한다. 반도체 전문가였던 고든 무어, 앤디 그로브, 크레이그 배럿이 인텔 CEO로 기술 혁신을 이끌며 전성기를 일궜는데, 마케팅 전문가 출신으로 2005~2013년에 CEO로 재임한 폴 오텔리니와 COO(최고운영책임자) 출신인 브라이언 크르자니크(2013~2019년 재임)가 인텔을 이끌면서 쇠락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특히 크르자니크는 원가 절감에 목을 매면서 투자와 연구·개발(R&D)에 소극적이었다. 모바일 전용 반도체로 넘어가던 시기에 인텔은 경쟁사보다 뒤떨어진 14㎚(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만을 고집해 “사골처럼 우려먹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또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인 밥 스완(2019~2021년 재임)은 투자 비용 회수를 따지다 오픈AI에 투자할 기회를 걷어찬 것으로 알려졌다. 영업통, 재무통 출신 CEO들의 헛발질이 잇따르자 뒤늦게 인텔은 2021년 밥 스완을 경질하고 기술 전문가인 팻 겔싱어 현 CEO를 회사로 다시 불러들였다. 그럼에도 인텔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파운드리는 ‘밑 빠진 독’ 되나
인텔은 강점을 보이던 서버용 CPU에서조차 AMD에 밀릴 처지에 놓였다. 인텔의 데이터센터 부문 올해 예상 매출액은 126억달러로 AMD(129억달러)에 추월당하고 내년에는 그 차이가 더 벌어질 전망이다. 역점 사업으로 올해 본격 시작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는 상반기에 총 53억달러 적자를 냈다. 이에 당초 계획했던 투자를 줄줄이 취소하거나 보류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 인근에 추진하기로 했던 AI와 HPC(고성능 컴퓨팅) 연구·개발 허브 설립 계획을 접었고, 이탈리아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계획도 중단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인텔의 파운드리 수익이 여전히 낮고, 핵심 제품(CPU)에 대한 수요도 거의 증가하지 않는 게 문제”라며 “인텔에 총 85억달러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한 미국 정부와 인텔이 앞으로 힘든 시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