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겔싱어 인텔 CEO./AFP 연합뉴스

파운드리 사업에 재진출하며 ‘인텔의 제2전성기’를 열겠다고 공언했던 팻 겔싱어(63)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2일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그가 CEO로 재직했던 3년 반 동안 인텔은 인공지능(AI) 붐에서 경쟁사를 따라잡는데 실패하고, 회사 실적이 크게 하락했다. 로이터통신은 소식통을 인용해 “진척이 없는 성과에 좌절한 이사회가 ‘해임이냐 사임이냐 선택하라’는 최후통첩을 했고, 그는 사임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사실상 신뢰를 잃고 이사회로 부터 강제 해고 통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2일 인텔은 보도자료를 내고 겔싱어 CEO가 1일부로 사임했다고 밝혔다. 후임자를 찾을때까지 데이비드 진스너 인텔 최고재무책임자(CFO)와 미셸 존스턴 홀트하우스 클라이언트컴퓨팅그룹(CCG) 사장이 공동으로 CEO업무를 보게됐다. 인텔은 후임자를 모색하기 위한 ‘서치 위원회’를 구성했다고도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인텔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56년된 이 회사가 몰락한 또다른 신호”라고 했다.

겔싱어 CEO는 이날 성명에서 “씁쓸한(bittesweet) 기분”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시장에 인텔을 맞추기 위해 힘들지만 필요한 결정을 내렸고, 올해는 우리 모두에게 도전적인 한 해였다”고 했다. 이날 인텔은 겔싱어의 사임을 ‘은퇴(Retirement)’라고 표현했다. 1979년 인텔에 입사해 인텔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승진하고, 잠시 회사를 떠났다 CEO로 인텔로 화려하게 복귀했던 그가 시대의 물결에 밀려 씁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진격했던 겔싱어…목표 너무 높았나

인텔은 미국 대표 반도체 생산기업으로, PC시대의 핵심부품인 중앙처리장치(CPU) 최강자로 수십년간 군림해왔다. 겔싱어가 CEO로 취임한 2021년은 이미 인텔이 모바일·AI시대 전환에 뒤처지며 휘청거리기 시작한 시점이다. 겔싱어는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으로 회사를 일으키려했지만, 이 계획도 결국 어려움에 부딪히게 됐다. 회사 내부에선 “겔싱어가 산업 변화에 대한 감각을 잃었고, 제품보다 새로운 공장을 짓는데 너무 집중하고 있다”는 불평이 나왔다. 그 사이 인텔의 실적은 지난 3분기에만 166억 달러(약 23조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추락했다.

겔싱어 CEO는 취임 후 3년 넘게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 및 재정비에 나섰다. 하지만 겔싱어가 내거는 목표에는 항상 ‘실현 가능한지 의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예컨대 그는 올해 2월 인텔의 ‘IFS 다이렉트 커넥트’ 행사에서 2030년까지 파운드리 업계 2위가 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발표 내내 현 시장 2위인 삼성전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언급을 피했고, 1위 기업인 대만 TSMC를 1나노대 최첨단 생산공정으로 곧 따라잡을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1나노대의 반도체 양산 계획은 TSMC나 삼성전자조차 확정하지 않은 기술을 2027년 실현시키겠다고 했다. 자사 첨단 생산 공정에 마이크로소프트(MS)를 이미 18A(옹스트롬·1.8나노에 해당 ) 공정 제품의 고객사로 확보했다고도 홍보했다.

겔싱어 CEO는 ‘파운드리 굴기’를 위해 파운드리 부문 실적을 따로 잡는 방식으로 회계방식을 수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인텔의 최첨단 공정의 생산 결함으로 일부 고객사들이 이탈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TSMC의 2나노 생산라인의 수율이 30%인 반면, 인텔이 내세원 18A 공정의 수율은 10% 미만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이에 2030년부터 연간 15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외부 고객으로부터 달성하겠다는 목표도 무색해졌다.

엔비디아를 잡겠다며 출시한 AI가속기 ‘가우디’도 고전했다. 겔싱어는 지난 10월 3분기 실적공개 전화회의에서 가우디의 활용이 예상보다 더디고, 올해 해당 제품의 판매 목표로 삼았던 5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인텔은 올해 직원 1만 5000명을 해고하고, 4분기 배당금 지급을 중단하며, 내년에 100억 달러의 비용을 절감하기로 하며 뼈를 깎는 지출 축소에 나섰다. 그럼에도 추락하는 인텔은 반도체 산업에 대한 대표성을 더 이상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지난달 다우존스 산업평균 지수에서 퇴출 당하게 됐고, 그 자리는 엔비디아가 대체하게 됐다.

◇미 정부와의 ‘허니문’ 어떻게 될까

지난 3월 인텔에 대한 미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발표 행사에서 팻 겔싱어 인텔 CEO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반도체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인텔은 이 같은 내부 사정에도 불구하고 조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간판’ 역할을 해왔다. 미 정부의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의 대표 주자로, 지난 3월 가장 많은 보조금 규모인 85억 달러의 현금 지원을 배당받았었다. 하지만 이 금액은 11월 최종 계약에서 78억 6000만 달러로 줄어들었다. 미 정부는 지원금 삭감이 인텔의 재정상태와 상관이 없다고 했지만, 업계에선 인텔이 정부에 약속한 반도체 생산라인 투자를 제대로 해낼지 의문과 우려가 커진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인텔은 생산라인 건축 계획을 다수 미루거나 취소했다. 그러면서 기존에 미국 정부에 약속했던 투자 계획이 보조금 기한이 2030년 이후로 미뤄지기도 했다. 인텔은 원래 향후 5년 동안 미국에 10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공언했었는데, 현재 그 계획은 10년 내 900억 달러로 크게 축소된 상태다. 실제로 인텔은 미국 오하이오에 2030년까지 두개의 생산라인을 건설할 계획이었지만, 현재는 하나의 생산라인만이 구축될 것으로 계획이 변경됐다. 생산라인 설립으로 기대되는 일자리수가 1만개에서 3500개로 크게 줄어들었다.

인텔의 주가는 올해들어서만 52% 폭락했다. 2일 겔싱어의 사임 소식이 알려지며 주가가 한때 5%대 상승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하락해 전 거래일 대비 1% 대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