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13일 처음으로 시가총액(이하 시총) 1조달러를 돌파했다. 브로드컴 주가는 이날 뉴욕 증시에서 전날보다 24.43% 오른 224.80달러(32만2857원)에 거래를 마쳤다. 미국 기업으로는 아홉 번째, 반도체 기업으로는 엔비디아에 이어 두 번째로 ‘1조달러 클럽’에 가입했다.

이날 브로드컴의 주가 폭등은 전날 분기 실적과 함께 발표한 인공지능(AI) 반도체 개발 계획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혹 탄(Tan)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는 “대형 클라우드 기업 3곳과 AI 반도체를 개발 중”이라며 “향후 3년간 AI에서 기회를 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언급한 협력 대상은 구글과 메타, 그리고 ‘틱톡’을 운영하는 중국의 바이트댄스다. 반도체 설계에서 검증된 기술력을 보유한 브로드컴이 확실한 AI 반도체 수요를 가진 빅테크와 손을 잡으면서,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독점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브로드컴과 빅테크의 협업

브로드컴은 12일 장 마감 후 4분기(회계기간 8월 5일~11월 3일) 실적을 발표했다. 매출은 140억5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51% 급증했고, 순이익(43억2000만달러)은 23% 늘었다. 특히 AI 부문 연간 매출은 전년 대비 220% 늘어난 122억달러로 집계됐다.

이튿날 24% 주가 급등은 이런 실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4분기 매출은 오히려 시장 예상치에 살짝 못 미쳤다. 실적 발표 때 탄 CEO는 “대형 하이퍼스케일러(AI에 필요한 대규모 데이터 센터 운영자)인 구글, 메타, 바이트댄스와 AI 반도체를 개발 중”이라며 “이들은 각각 2027년까지 (브로드컴과 함께 만든) 100만 개의 맞춤형 AI 칩을 데이터센터에 쓸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AI 개발에 가장 적극적인 빅테크 세 곳과 AI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겠다는 얘기다. 이들과의 협업으로 2027년까지 600억~900억달러의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픽=김하경

탄 CEO는 위의 세 곳보단 규모가 작은 하이퍼스케일러 2곳과도 비슷한 계약을 체결했다고 덧붙였다. 브로드컴은 이미 오픈AI·애플과의 협력 사실을 공개했었다. 지난 11일 IT 전문 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애플이 브로드컴과 함께 AI 연산 처리를 위한 서버 칩을 개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칩 생산은 대만 TSMC의 3나노 공정이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脫엔비디아 위한 몸부림

브로드컴은 와이파이나 블루투스와 같은 통신 장비에 들어가는 반도체 설계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챗GPT와 같은 AI 애플리케이션(앱)에서 데이터 처리를 돕는 첨단 네트워킹 반도체와 데이터 센터 서버에 전력 공급을 지원하는 반도체를 만들면서 AI 수혜 기업으로 떠올랐다. 특히 특정 작업에 최적화된 맞춤형 반도체(ASIC)에 강점을 보이면서 주요 AI 개발사와 협업을 늘리고 있다. 이 반도체는 엔비디아의 AI 반도체와 비교해 에너지 효율이 높다. JP모건은 현재 200억~300억 달러 규모의 ASIC 시장이 장기적으로 연간 2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브로드컴이 55~6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는 지배적인 기업이라고 분석했다.

업계와 시장이 브로드컴의 발표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 것은 빅테크들이 브로드컴과 AI 반도체를 개발하면서 이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엔비디아의 장악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구글, 메타, 아마존 등은 엔비디아 제품을 사재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엔비디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현재 AI 공급망 구도는 반도체 설계와 네트워크, 소프트웨어까지 모두 엔비디아가 담당하고 있어 사실상 AI 개발을 전적으로 엔비디아에 의존해야 한다.

지난 6월 구글·MS·메타·인텔·AMD·브로드컴·시스코·HP엔터프라이즈 등 8곳은 AI 가속기의 글로벌 표준을 만들기 위한 ‘울트라 가속기 링크(UA링크)’를 설립했다. UA링크는 엔비디아 사재기 경쟁을 중단하고 빅테크가 앞장서서 새로운 AI 반도체 공급망을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엔비디아가 독점하고 있는 반도체 설계와 네트워크·보안 분야는 각각 브로드컴과 시스코에 몰아주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번 브로드컴 협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브로드컴

엔비디아·퀄컴 같은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팹리스). 특히 와이파이 등 네트워크와 통신 반도체의 강자다. 최근 데이터 센터, 인공지능(AI), 사물 인터넷(IoT) 등을 포함한 고성능 반도체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1991년 UCLA의 교수와 학생이 창업한 회사가 2016년 싱가포르 반도체 회사 아바고에 인수되면서 지금의 브로드컴이 됐다. 2017년 경쟁 업체 퀄컴을 1300억달러(약 187조원)에 인수하려다 당시 미국 트럼프 정부의 반대로 무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