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산업성은 내년에 자국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에 1000억엔(약 9300억원)을 지원한다고 지난 25일 밝혔다. 2025회계연도(내년 4월~2026년 3월) 예산안에서 반도체 분야에 총 3300억엔을 배정했는데 3분의 1가량을 한 기업에 몰아주기로 한 것이다. 라피더스는 도요타·소니 등 일본 기업 8곳이 2022년 합작 설립한 회사로, 일본의 반도체 산업 부활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기업이다.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라피더스에 지급하기로 약속한 지원금은 1조200억엔(약 9조5000억원)에 이른다.
일본은 경제산업성 산하 기관인 정보처리추진기구(IPA)를 통해 정부 예산으로 라피더스에 자금을 지원하고, 라피더스가 일본 민간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을 경우 이에 대한 채무 및 이자 지급 보증도 맡는다는 내용의 정보처리촉진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일본에서 정부가 특정 기업의 채무 보증을 서는 일은 이례적이다. 라피더스가 오는 2027년 초미세 공정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자금을 총 5조엔 모으고 있는데, 정부 예산만으로는 쉽지 않아 추가로 민간 투자를 활발히 이끌어내고자 과감히 규제를 허문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주요국이 반도체 기업에 천문학적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있다. 갈수록 고조되는 반도체 공급망 경쟁을 주도하려고 자국 기업을 육성하거나 해외 업체를 유치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해 추진한 반도체특별법이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는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다.
◇반도체 기업 위해 법 바꾼 日
일본은 민간과 정·관계가 똘똘 뭉쳐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정부가 라피더스 지원금 규모를 늘리는 가운데 올해 도요타·덴소 등 라피더스의 주주 회사들이 1000억엔을 출자하는 등 민간 투자도 활발하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지원이 마중물이 돼 민간 투자도 늘고 있는 것이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달 국회에서 “향후 10년간 반도체와 AI(인공지능) 분야에 10조엔(약 9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의 집중 육성 정책은 기업들의 반도체 투자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 메모리 업체 키옥시아는 최근 상장으로 확보한 자금에 2400억엔 규모의 일본 정부 지원을 더해 미에현·이와테현 공장을 증설하기로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항할 차세대 낸드를 생산하려는 것이다. 반도체용 금속 재료인 ‘스퍼터링 타깃’ 시장에서 글로벌 1위(점유율 60%)인 ‘JX닛폰 마이닝 앤드 메탈’은 지난 3월 스마트폰 소재 생산을 위해 세운 일본 신공장을 반도체 소재 생산 시설로 전환했다. 일본 내 투자 증가로 첨단 반도체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일본 정부에서 조(兆) 단위 보조금을 받는 대만 TSMC도 최근 일본에서 공장 가동에 들어갔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TSMC는 일본 구마모토현 제1 공장에서 반도체 시험 생산을 마치고 이달부터 본격 양산에 들어갔다.
◇반도체 지원 강화하는 각국
일본뿐 아니라 중국, 미국, 대만 등 주요 국가는 AI 시대 들어 반도체가 국가 안보의 핵심이 되자 첨단 반도체 생산과 연구 인력 확보를 위해 거액을 쏟아붓고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 5월 역대 최대인 3440억위안(약 69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반도체 산업 지원에 투입한다. 미국의 첨단 반도체 장비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 설비 건설 보조금뿐 아니라 반도체 장비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까지 지원 대상을 넓혔다.
반도체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주지 않던 대만 정부도 최근 국내외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대만 정부는 지난 5월 엔비디아와 마이크론의 R&D 센터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보조금을 총 114억대만달러(약 5100억원) 지원했다. 대만 기업은 아니지만, 자국의 반도체 생태계 강화를 위해 외국 기업에도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주요국들은 반도체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간주해 특정 기업에 거액 보조금을 직접 지원하고, 정책 실행 속도도 높이고 있다”며 “반면 한국은 간접 지원책에만 집중돼 있고, 그나마 정책 집행도 불확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