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충북 증평 두산전자 공장에서 한 근로자가 동박적층판 공정을 점검하고 있다. /두산전자

지난 7일 충북 증평 농공 단지 내 있는 두산전자 공장. 생산 라인에선 머리카락보다 가는 30마이크로미터(μm·1마이크로미터는 100만분의 1미터) 굵기의 유리섬유가 10여 가지 특수 용액과 섞여 헝겊 모양으로 나왔다. 여기에 얇은 동박(銅箔)을 샌드위치처럼 여러 장 겹쳐 찍어내고 있었다. 최첨단 인공지능(AI) 반도체 안에서 전기를 안정적으로 통하게 하는 핵심 소재 ‘동박 적층판(CCL)’이다. CCL은 TV·노트북 등 대부분 IT 제품에 들어간다. 이전에도 영업 이익률 10% 안팎에 안정적 수익을 내주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2023년 주 공급처인 모바일 산업이 침체되면서, 매출이 하향 곡선을 그렸다. 두산전자는 범용 제품 대신 AI 반도체와 데이터 센터용 CCL 사업에 주력했다. 업계에 따르면, 두산전자는 지난해 엔비디아 납품에 성공했다. 엔비디아는 이전에 이 분야 세계 1위인 대만 업체와 거래했지만, 전량 두산전자로 주문처를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전자는 작년 4분기 ‘주 6일, 24시간’ 가동 체제를 휴일 없는 ‘주 7일, 24시간’으로 바꿨다. 연 매출 8000억원(2023년 기준)인 두산전자는 올해 엔비디아에서만 최대 5600억원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또다른 빅테크 두 곳 납품도 최근 확정 지었다.

◇AI로 재편된 전자 산업 생태계

AI 열풍은 기존 산업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국내 전자 부품 기업 중에선 AI로 확장된 산업 생태계에서 성과를 내는 곳들이 나타나고 있다. 본지가 국내 반도체·전자·전기 업종 상장사 251곳의 지난 5년간 실적 추이를 전수조사한 결과, 매출이 감소세를 보이다 AI 붐이 본격화한 2023년 이후 상승세로 전환된 곳이 105사(41.8%)였다. 이 기간 매출 상승률이 이전보다 더 가팔라진 곳도 43개(17.1%) 업체였다. 한 전자 부품업계 관계자는 “지난 몇 년 동안 스마트폰·TV 등의 수요가 들쭉날쭉했던 것을 감안하면 부품사 실적 개선은 AI를 제외하고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래픽=백형선

비상 발전 설비 및 신재생에너지 전문 기업인 지엔씨에너지는 지난해 3분기 매출액 740억원, 영업이익 132억원을 기록하며 1989년 창사 이래 최대 분기 실적을 올렸다.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87%, 영업 이익은 1304% 늘었다. 지난 2년 동안 데이터센터에 설치되는 비상 발전 설비 수요가 급증하면서 실적이 크게 뛰었다.

한미반도체는 2021년 3732억원이었던 매출액이 2023년 1590억원으로 반토막 났다. 작년엔 3분기까지 4093억원의 매출액을 올리며 반등했다. 핵심 AI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필수적인 ‘열압착 본딩’ 장비 때문이다.

‘전자 산업의 쌀’로 불리는 적층 세라믹 콘덴서(MLCC)도 AI 반도체 관련 수요가 최근 급증하고 있다. MLCC는 전자제품 회로에 전류가 일정하게 안정적으로 흐르도록 제어하는 핵심 부품이다. AI 서버에는 기존 서버 대비 10배 이상의 MLCC가 필요하다. AI PC와 AI 스마트폰에도 일반 제품보다 10~20% 더 들어간다. MLCC 분야 세계 점유율 2위인 삼성전기(23~25%)는 1위 무라타제작소(40%), 3위 다이요유덴(10~13%) 등 일본 업체들과 치열한 경쟁 중이다. 삼성전기는 지난해 매출 10조원(추정치)을 처음 돌파했고, 올해 AI 서버용 MLCC 관련 매출이 전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반도체 기판에서 일본·대만과 경쟁

차세대 반도체 기판 분야도 국내 전자 부품 업체들의 새 먹거리다. 반도체 성능이 좋아질수록 칩과 부품을 받쳐주는 기판이 전기신호를 더욱 빠르게 전달해야 한다.

이 분야에서 각광받는 것이 FC-BGA(플립 칩 볼 그리드 어레이)와 유리 기판이다. 기존에는 얇은 금속 배선으로 칩과 기판을 연결했는데, FC-BGA는 기판 위 금속 돌기에 바로 칩을 연결해 신호 전송 속도가 빠르다.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이 일본과 대만의 아성에 도전한다. 삼성전기는 최근 이 분야에만 2조원 넘게 투자했고, 미국 AMD 납품에 성공했다. LG이노텍도 지난달 양산에 들어가 북미 빅테크 고객을 확보했다. 유리 기판은 플라스틱 소재 대비 표면이 매끄러워 더 미세한 회로를 더 많이 그릴 수 있고 전력 효율이 좋다. 삼성전기∙LG이노텍∙SKC 모두 유리 기판을 주력 신산업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기판

반도체 칩을 보호하고, 다른 부품들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판이다. 전기가 통하는 회로와 안 통하는 절연체가 겹겹이 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