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밀려 만년 3위였던 미국 마이크론이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앞세워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작년 초 4세대인 HBM3를 건너뛰고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보다 앞서 5세대인 HBM3E 8단 양산 소식을 발표한 데 이어, 올해 16단 제품 양산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프리미엄 스마트폰 갤럭시S 시리즈에서도 초도 물량에서 삼성전자 반도체를 밀어내고 1차 메모리 공급사 지위에까지 올랐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그간 범용 D램 분야에서 3위 자리를 지키던 마이크론이 맞춤형 반도체인 HBM과 더불어 저전력 차세대 메모리에서도 잇따라 성과를 보이고 있다”며 “그동안 마이크론을 크게 의식하지 않던 국내 반도체 업체들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HBM 앞세워 D램 맹추격
HBM은 D램을 쌓아 만드는데, 단수가 높을수록 고성능이다. 마이크론은 현재 엔비디아의 AI 반도체에 5세대인 HBM3E 8단을 납품하고 있다. 하지만 물량에서 SK하이닉스에 완전히 밀려 존재감이 크지는 않았다. 현재 양산되고 있는 가장 높은 단수의 제품은 SK하이닉스의 HBM3E 12단이다. 하지만 엔비디아의 차세대 제품에 탑재될 HBM3E 16단 양산은 SK하이닉스와 거의 동시에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마이크론이 16단 제품 양산을 위한 최종 설비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며 “필수 공정 장비에 대해서도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작년 11월 처음으로 16단 개발을 공식화하고 상반기 본격적인 양산 준비에 들어갈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내 16단 개발을 완료하겠다는 계획만 밝힌 상황이다. 증권가에선 작년 HBM 시장 점유율이 한 자릿수에 그쳤던 마이크론이 올해는 두 자릿수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마이크론은 HBM뿐 아니라 저전력 D램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마이크론은 삼성전자가 이달 22일 공개할 플래그십 스마트폰 갤럭시 S25에서도 초도 물량의 대부분을 공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스마트폰 1차 공급사 자리에 삼성전자가 아닌 기업이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전해졌다. 데이터 처리 속도는 빠르고 전력 소모는 줄인 메모리 반도체인 LPDDR5X의 전력 효율, 성능 등에서 삼성전자를 앞섰다는 분석이다.
작년 글로벌 D램 점유율도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마이크론의 작년 3분기 D램 점유율은 22.2%로 직전 분기(19.6%) 대비 2.6%포인트 올랐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41.1%, 34.4%로 직전 분기 대비 소폭 줄었다.
◇생산 능력 잇따라 확대하며 존재감 키워
미국 메모리 반도체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마이크론은 그간 기술력에 비해 자금력과 생산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하지만 미국의 칩스법을 등에 업고 관련 투자를 이어오며 생산량을 크게 키우고 있다. 마이크론은 작년 말 미국 상무부로부터 61억6500만달러 규모의 반도체 보조금 지급을 확정받았다. 미국 아이다호주와 뉴욕주에 총 1250억달러를 투자하는 데 따른 보조금이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이달 초 마이크론은 싱가포르 우드랜즈 지역에 약 70억달러(한화 약 10조원)를 투자해 HBM 전용 첨단 패키징 공장을 짓는다고 밝혔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HBM은 엔비디아와 브로드컴에 공급될 계획이다. 싱가포르 공장과 함께 일본 히로시마 공장에서도 2027년 HBM 생산 시설을 가동할 예정이다. 업계에 따르면 작년 말 HBM 월 생산량이 2만장 수준이었던 마이크론의 생산 능력은 올해 말 6만장으로 3배로 증가할 전망이다.
하지만 마이크론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도 있다. 생산 능력을 크게 키우고는 있지만 두 회사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데다가, 양산 공정을 안정화시키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주력인 2~4세대 HBM 생산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주도하고 있다”며 “특히 마이크론의 HBM 전용 공장이 가동되는 건 2027년이고, 수율을 높여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