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31일 지난해 4분기 확정 실적과 사업별 실적을 발표했다. 삼성은 역대 둘째 높은 연 매출, 반도체 사상 첫 연 매출 100조원 돌파 등 외형적 성과에도 반도체를 비롯한 주요 사업 부문의 영업이익이 시장 기대치를 밑돌았다. 수익성 제고를 위해 중국 저가 반도체 공세와 HBM(고대역폭 메모리) 기술 격차를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삼성전자는 지난 4분기 매출 75조7883억원, 영업 이익 6조4927억원(이하 연결 기준)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디바이스 설루션) 부문에서 4분기 매출 30조1000억원, 영업이익 2조900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전체로 볼 때 삼성전자는 매출 300조9000억원, 영업이익 32조7000억원을 올렸다. 연 매출로는 2022년(302조2300억원)에 이어 역대 둘째로 높았지만 영업이익은 증권가 전망(34조원)을 하회했다. 반도체 부문 연 매출은 111조1000억원으로 처음 100조를 넘었지만, 영업이익은 15조1200억원에 머물렀다.
삼성전자는 수익성 개선을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인 HBM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삼성전자 실적 발표 이후 콘퍼런스 콜(실적 설명회)에서 “지난해 4분기부터 그래픽처리장치(GPU) 공급사, 데이터 센터 업체를 중심으로 5세대 HBM 3E 8단 제품의 공급을 확대했다”며 “5세대 HBM 3E 개선 제품을 1분기 말부터 양산해 주요 고객사에 공급할 예정”이라고 했다.
◇외형 성장에도 수익성 기대 못 미쳐
삼성전자 수익성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반도체였다. 중국 업체들의 저가 물량 공세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범용 D램 가격이 크게 하락한 반면, 엔비디아 AI 칩에 들어가는 HBM과 같은 고부가가치 메모리 시장은 팽창하는 ‘메모리 양극화’가 심화됐는데 그 영향을 삼성전자가 고스란히 맞았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는 D램·낸드플래시 등 범용 메모리가 실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제품들은 가격 변동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PC용 D램 범용 제품의 평균 가격은 지난해 하반기 36% 하락했고, 낸드 가격도 같은 기간 반 토막이 났다. 삼성전자는 콘퍼런스 콜에서 “4분기에 역대 최대 매출을 올렸지만 연구개발비 및 첨단 공정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비용 증가로 영업 이익이 전 분기 대비 소폭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와 시스템LSI 사업(반도체 설계) 등 비(非)메모리 사업은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증권가에선 메모리 사업부가 5조원대 영업 이익을 올렸지만 시스템LSI, 파운드리에서 2조원이 넘는 적자를 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반도체 이외에 스마트폰·네트워크를 담당하는 MX(모바일 경험)사업부도 4분기에 시장 기대치에 미달하는 2조1000억원의 영업 이익을 기록했다. 가전 사업은 2000억원 영업 이익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와 비교해 흑자 전환했지만, 경쟁 심화로 당초 전망치인 5000억원에는 못 미쳤다.
◇반등의 열쇠는 ‘HBM’
올 1분기 전망도 밝지 않다. 삼성전자는 이날 “올해 대외 불확실성 속에서 상반기 약세 지속이 예상돼 1분기 실적 개선도 제한적일 것”이라고 했다. 증권가에선 반도체 부문이 영업 적자를 기록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HBM을 비롯한 고부가가치 메모리 비율을 크게 확대해 위기를 돌파한다는 계획이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이날 “(미국의) AI용 반도체 수출 통제로 변동성이 있겠지만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환할 것”이라며 “고사양·고용량 제품 수요 대응을 위한 첨단 공정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이를 위해 지난해 30%이던 DDR4 등 구형 D램의 매출 비율을 올해 한 자릿수까지 낮추고 HBM 공급량을 2배 늘린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중국 업체들이 DDR5 양산에 본격 나선 것으로 알려지면서 첨단 메모리에서도 중국의 추격을 따돌려야 한다.
삼성전자는 투자 확대로 반전 기회를 잡겠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역대 최대인 53조6000억원을 설비투자에 썼다. 이 중 86%인 46조3000억원을 반도체 사업에 투입했다. 파운드리 대신 메모리 부문에 상당수 투자를 집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 2분기부터 AI 스마트폰과 서버 등 AI 관련 메모리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이를 기회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다. HBM의 경우, SK하이닉스가 사실상 엔비디아에 5세대 HBM을 독점 공급하고 있는 데다 미국 마이크론도 지난해 엔비디아에서 HBM 3E 8단 인증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HBM 후발 주자인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의 공급 자격을 얻더라도 충분한 공급 물량을 확보하려면 가격·성능에서 경쟁사를 앞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