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오사AI 백준호 대표가 지난 2023년 7월 6일 오후 서울 중구 조선일보 스튜디오에서 제품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기업인 메타(페이스북 모회사)가 한국의 인공지능(AI)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인 ‘퓨리오사AI’ 인수를 추진한다. 주요 AI 빅테크 기업들이 대규모 데이터센터에 들어갈 자체 AI 칩을 개발하고 있는 가운데, 이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뒤처진 메타가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을 통째로 사서 경쟁자들을 따라잡겠다는 것이다. 테크 업계에서는 “고가의 엔비디아 AI 칩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빅테크들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메타와 퓨리오사는 매각 협상을 진행하고 있고, 이르면 이달 내로 계약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있다. 현재 양측은 퓨리오사가 최근 진행했던 투자 모금 과정에서 인정받은 8000억원대의 기업가치를 기준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메타의 퓨리오사 인수 추진은 그동안 불모지에 가까웠던 국내 팹리스의 경쟁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기술력을 갖춘 스타트업을 국내 기업이 아닌 외국 빅테크가 가져가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퓨리오사를 인수할 만한 자금과 전략을 가진 기업이 국내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빅테크가 노린 국내 팹리스 기업

퓨리오사AI가 공개한 2세대 인공지능(AI) 가속기 레니게이드. /퓨리오사AI 홈페이지

메타가 눈독을 들이는 퓨리오사는 미국 조지아텍 전자공학부 학·석사 출신으로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와 미국 반도체 기업 AMD 등을 거친 백준호(48) 대표가 2017년 창업한 기업이다. SK텔레콤·KT가 주요 주주로 참여한 스타트업 리벨리온과 함께 엔비디아가 장악한 AI 칩 시장에 도전해온 국내 대표 팹리스 기업으로 꼽힌다. 삼성전자뿐 아니라 구글·아마존 같은 빅테크 출신 엔지니어들이 모여 AI 칩 설계에 집중했다.

퓨리오사는 특히 고속 데이터 처리에도 전력을 적게 쓰는 반도체 설계에 강점을 지니고 있다. 퓨리오사는 지난해 8월 AI 칩 신제품 ‘레니게이드(RNGD)’를 공개하며 “엔비디아의 첨단 AI 칩보다 60% 나은 전력 효율성을 갖췄고, 메타의 라마2와 라마3 같은 고급 AI 모델을 대규모 배포할 수 있다”고 했다. 비슷한 성능을 유지하면서 비용 면에선 엔비디아 칩의 절반 수준으로 저렴하다는 것이다. 실제 2021년 세계 최고 권위의 AI(인공지능) 반도체 성능 경연 대회서 퓨리오사는 엔비디아를 앞서기도 했다.

그래픽=이철원

퓨리오사는 올해 대만 TSMC에서 AI 칩 ‘레니게이드’를 양산한다는 계획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 외에 고성능 AI 모델을 돌릴 수 있는 칩이 몇 없다”며 “메타에 퓨리오사는 좋은 인수 선택지로 보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한국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 등 제조에선 세계적 수준에 올랐지만, 팹리스에선 존재감이 미미하다. 삼성전자와 네이버가 공동으로 ‘마하’라는 AI 칩 개발을 진행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번 매각 추진을 두고 “국내 산업 생태계가 기술력을 가진 팹리스를 육성할 만큼 형성돼 있지 않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퓨리오사는 최근 급하게 신규 투자를 유치하는 등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메타와 매각 협상에 나섰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내 투자 업계 관계자는 “퓨리오사에 투자할 만한 자금력과 사업 비전을 가진 펀드나 기업이 한국에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빅테크, ‘자체 칩 전쟁’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뉴스1

메타가 퓨리오사 인수에 나서는 이유는 주요 빅테크 중에서 자체 칩 개발에서 가장 성과를 못 내고 있기 때문이다. 메타는 지난해 4월 엔비디아의 AI 칩을 대체하기 위한 자체 칩 ‘MTIA’ 2세대 칩을 공개했다. 앞서 ‘아르테미스’라는 프로젝트명으로 알려졌던 이 반도체는 내부 테스트에서 전작 대비 AI 모델 추론에서 3배 나은 성능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제품 공개 이후 근 1년이 흐르는 동안 MTIA를 실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나오지 않아, 사실상 자체 칩 개발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메타뿐 아니라 빅테크 기업들은 자체 AI 칩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오픈AI도 팹리스 기업 세레브라스 인수를 고려했었고, 이후 구글에서 AI 반도체 전문가를 영입해 자체 반도체팀을 꾸렸다. 10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오픈AI는 몇 달 안에 첫 반도체 설계를 TSMC에 넘겨 테스트 제품 생산에 나설 예정이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도 각자 자체 칩의 활용을 늘리고 있다. 아마존은 지난 12월 공개한 ‘트레이니엄3’로 채워진 데이터센터를 구축해 앤스로픽의 AI를 훈련한다는 계획이고, 구글은 차세대 AI 칩 ‘트릴리움’을 애플에 제공해 애플 인텔리전스를 훈련한다는 협력 관계를 맺었다. MS는 자체 개발 중앙처리장치(CPU) ‘코발트 100’을 출시했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중국 딥시크 충격 이후 AI 개발에 꼭 최고 성능 AI 반도체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자체 칩 개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