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이 자체 칩 설계에 나설 전망이다. 올해 처음 반도체를 선보이고 첫 고객으로 페이스북 모기업 메타가 될 것으로 보인다.
13일(현지 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는 “르네 하스 ARM 최고경영자(CEO)가 이르면 오는 여름 자체 제작한 첫 칩을 공개할 예정”이라며 “메타를 첫 고객사로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보도 이후 ARM 주가는 6% 넘게 상승했다.
ARM의 첫 반도체 설계 제품은 AI칩에 들어가는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아닌 대규모 데이터 센터의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FT는 “ARM의 자체 칩 출시가 향후 AI 칩 생산으로 전환하려는 더 큰 계획의 한 단계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2016년 ARM을 인수한 대주주인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AI 인프라 확장을 목표로 ARM을 핵심 사업으로 삼고 있으며, 자체 칩 출시는 AI 칩 시장 진출의 중요한 단계라는 설명이다.
ARM은 그동안 반도체 설계 자산(IP)을 엔비디아,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에 판매하는 역할에 그쳤다. 삼성 등 반도체 기업들은 ARM의 기본 설계도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반도체 설계도를 만들어 칩을 제조해왔다. 미국의 퀄컴에 스마트폰 개발, 엔비디아에 데이터센터 반도체 설계 기술을 공급해왔다. ARM이 자체 반도체를 만든다면 기존에 이 기술을 채택한 고객들과 직접 경쟁하게 된다.
오픈AI도 최근 자체 AI칩 설계,제작을 선언했다. 연내 자체 AI 칩 설계를 완료할 계획이다. 오픈AI는 내년 TSMC에서 자체 맞춤형 AI 칩(ASIC)을 대량 생산한다는 목표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는 수십년 동안 설계와 생산 분야가 철저히 나눠지는 분업화 체계가 정착됐다. 한 기업이 모든 반도체 공정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역할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ARM이 모바일 칩 설계 시장의 90%를 독점하고 있지만 라이선스 비용을 크게 올리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분업화 체제 때문이다. ARM의 반도체 설계자산이 뛰어나서 삼성, 퀄컴 등이 라이선스를 가져다가 ARM 기반 칩을 만들고 있지만, ARM이 설계 기술로 폭리를 취할 경우 각 회사들이 분업화 시스템을 버리고 ARM이 하던 역할까지 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ARM이 직접 설계로 뛰어든 것은 이같은 분업체계를 깨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ARM의 설계 시장 진출은 반도체 설계 시장에서의 막강한 지배력에도 그만큼의 수익은 내기 어려운 상황 때문으로 풀이된다. 로이터통신은 “ARM이 스마트폰·데이터센터용 반도체 부상에 핵심 역할 했지만 2024 회계연도 매출이 32억3000만달러(약4조7000억원)로 고객사들에 비해 여전히 작다”고 전했다. 피카소 프로젝트로 불린 ARM의 칩 설계 진출 계획은 반도체 설계부터 수직계열화할 수 있다는 손정의 회장의 큰 그림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