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사진=로이터연합뉴스·로이터뉴스1

일본 소프트뱅크 소유의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이 자체 칩 설계 시장에 뛰어든다. ARM은 그동안 완제품 형태의 반도체를 개발하는 대신 퀄컴(스마트폰)·인텔(데이터센터) 등 분야별 칩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 기업에 반도체 설계 노하우(IP·지식재산권)를 제공하고 로열티(사용료)를 받아왔다. 그런데 올해부터 직접 반도체 완제품 설계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ARM의 변신에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야심이 있다는 분석이다. 손 회장은 AI(인공지능) 칩 시장의 최대 강자인 엔비디아와 맞붙겠다는 구상이다. ARM이 AI 칩을 넘어 스마트폰용 칩 설계까지 직접 한다면, 삼성전자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수십 년간 공고히 유지됐던 글로벌 반도체 분업 체제가 완전히 재편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픽=양진경

◇반도체 분업화 생태계 깨진다

13일(현지 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는 “르네 하스 ARM 최고경영자(CEO)가 이르면 올여름 자체 개발한 첫 칩을 공개할 예정”이라며 “메타(페이스북 모기업)를 첫 고객사로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메타는 천문학적 자금을 투자해 AI용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있다.

ARM은 첫 반도체 설계 제품으로 대형 데이터센터의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를 내놓을 전망이다. ARM이 강점을 갖는 CPU에서 설계 경험을 쌓고, 이후 엔비디아가 장악한 그래픽처리장치(GPU)에도 진출한다는 전략이다. FT는 “ARM의 자체 칩 출시가 향후 AI 칩 개발 업체로 전환하려는 더 큰 계획의 첫 단계”라고 전했다. 관련 보도 이후 ARM 주가는 6% 넘게 상승했다.

ARM의 칩 설계 시장 진출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뒤흔드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도체는 개발 공정이 복잡해지면서 설계와 생산을 업체별로 나눠 맡는 분업 방식이 일반화됐다.<그래픽 참조>

ARM은 반도체 공정의 첫 단계인 기본 설계 분야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ARM이 어떤 종류의 반도체에도 적용할 수 있는 설계 자산(IP)을 인텔, 엔비디아, 퀄컴, 삼성전자 등 팹리스에 로열티를 받고 판매한다. 각 기업은 이를 토대로 스마트폰, 자율 자동차, IoT(사물인터넷),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전용 칩을 설계한다. 이를 TSMC와 삼성전자 등이 최종 생산한다. ARM이 지금까지 자신들의 고객이었던 팹리스 기업과 직접 경쟁하게 된 것이다.

◇AI 제국 향한 손정의 야심

ARM의 변신이 AI 칩 기본 설계부터 AI 모델까지 ‘글로벌 AI 제국’을 세우려는 손정의 회장의 큰 그림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손 회장은 2016년 360억달러(약 52조원)에 ARM을 인수했다. ‘AI 플랫폼 기업’을 목표로 내걸고 작년엔 오픈AI에도 투자했다. 최근엔 730조원 규모의 AI 프로젝트 ‘스타게이트’도 주도하고 있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손 회장은 우선 엔비디아와 TSMC가 장악한 글로벌 AI 칩 시장에 대항할 새로운 반도체 생태계를 구상하려 한다”며 “그 출발이 ARM의 설계 시장 진출”이라고 했다.

ARM은 기존 고객사들과 경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엔비디아는 데이터센터용 CPU를 설계할 때 지금까지 ARM의 설계 자산을 이용하고 있다. ARM이 직접 설계까지 하게 되면, 엔비디아는 ARM의 고객사이자 최대 경쟁 기업이 된다. ARM은 현재 데이터센터 CPU와 향후 GPU 시장을 노리고 있지만, 스마트폰 칩으로 시장을 확장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퀄컴과 삼성전자가 직접 타격을 받는다.

ARM의 고객사인 팹리스 업체들의 반격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재는 팹리스들이 ARM의 설계 자산에 의존하고 있지만 점차 ARM 기술을 활용하는 대신 독자 원천 기술 개발에 나설 수 있다. 실제 퀄컴은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누비아를 인수해 ARM 기술이 아닌 자체 IP를 활용한 CPU 칩을 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