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계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AI) 모델 개발을 목표로 ‘국가대표 AI 팀’을 선발하고, 컴퓨팅 자원과 연구비 등 지원을 집중한다. 이를 통해 ‘한국형 챗GPT’ 모델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AI의 핵심 인프라인 그래픽처리장치(GPU) 반도체는 연내 1만장을 확보한다. 미국·중국·유럽 등 주요국이 AI 산업 주도권을 잡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도 정부의 집중 투자를 통해 AI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20일 제3차 국가 인공지능 위원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국가 AI 역량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국가 인공지능 위원회는 ‘AI 3대 강국’을 목표로 지난해 9월 민관 합동 국가 AI 정책 컨트롤 타워로 출범했다. 이날 3차 위원회에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등 정부·민간위원과 네이버, 모레, 라이너 등 기업 관계자 40여 명이 참석했다.
먼저 ‘AI 국가대표 정예 팀’을 선발해 독자적인 거대언어모델(LLM)을 개발하는 ‘월드 베스트 LLM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LLM은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한 AI 모델로, 오픈AI의 GPT, 구글의 제미나이 등이 대표적이다. 기업들마다 분산된 AI 역량을 한데 모아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정부가 연구비·데이터·GPU 등 연구 자원을 집중해 ‘소버린(주권) AI’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또 AI 기업·연구기관을 위해 2026년 상반기까지 고성능 GPU 1만8000장을 확보한다. 부족한 AI 인재 양성을 위해 신진 연구자에게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AI 관련 대학원 확장도 추진한다.
◇산학협력형 ‘AI 융합 대학원’ 신설… 유니콘 5개 육성한다
정부가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AI 역량 강화에 나선 배경에는 한국이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낙오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미국 정부는 약 730조원을 들여 초거대 AI 인프라 구축 사업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 딥시크는 저비용으로 글로벌 빅테크에 맞먹는 성능의 AI를 구축해 업계에 충격을 줬다. 최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도 거액의 자금을 투입해 자체 AI 모델 구축에 나서고 있다.
반면 한국의 AI 경쟁력은 이 같은 선도국에 비해서는 뒤처지는 실정이다. 한국은 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X, LG AI연구원의 엑사원 등 자체 AI 모델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AI 기술력은 미국 대비 1년 이상의 격차를 보이고 있으며, 유럽에 비해서도 뒤처지고 있다. AI 연구에 필수적인 인프라와 인재 모두 부족하다. 2023년 기준 엔비디아의 고성능 GPU인 H100의 국내 보유량은 2000장으로, 15만장 이상 보유한 메타·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에 비해 턱없이 적다. 세계 상위 20% AI 연구원 중 한국인 비율은 2%에 불과하다.
◇K-GPT 만든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내세운 것이 자체 고성능 AI 모델을 개발하는 ‘월드 베스트 LLM 프로젝트’다. 국내 최고 AI 기술을 가진 기업들에 정부의 데이터, 컴퓨팅 자원, 연구비 등을 집중해 최고 수준의 AI 모델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대기업, 스타트업, 학계 등 구분 없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원할 수 있다. 이렇게 선발된 팀에 GPU와 데이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인재 유치를 위한 연구비 등도 지원한다. 구체적인 사업 방식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공모 방식으로 5~10팀을 선별하고, 이후 경쟁을 통해 고성능 AI 모델을 추려가는 방식이 거론되고 있다. 이경우 국가 인공지능 위원회 지원단장은 “연내에 국민들이 기대하는 수준의 LLM이 나와줄 것을 기대하고 신속하게 투자를 이어가겠다”며 “사업 예산과 공모 시기 등은 추후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AI의 필수 인프라인 고성능 GPU는 내년 상반기까지 1만8000장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GPU 1만장은 정부가 추진 중인 AI 전용 데이터 센터인 ‘국가 AI 컴퓨팅 센터’를 중심으로 연내 확보하고, 나머지 8000여 장도 수퍼 컴퓨터 6호기 구축을 통해 확보할 예정이다. 이경우 단장은 “당장 필요한 부분에선 엔비디아 GPU를 활용하겠지만, 2030년까지는 국산 AI 반도체 비율을 50%까지 높이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AI 인재 양성을 위해 국내 AI 신진 연구자에게 과제당 연 20억원 규모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AI 고급 인재 육성을 위해 산학 협력형 AI 융합 대학원의 신설도 추진한다.
◇AI 유니콘도 5개
정부는 현재 국내에 전무한 AI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을 2027년까지 5개 양성한다는 목표다. 2027년까지 정부, 민간 자금 등 약 3조원 규모의 AI 펀드를 조성·운용해 AI 스타트업에 자금을 공급한다. AI 학습을 위해 공공·민간 데이터도 산업계에 개방한다. 정부는 그간 자율 주행에만 한시적으로 영상 등 비정형 원본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이를 AI 연구까지 확대해, 각종 데이터를 우리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이날 발표 내용과 방향성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AI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 방안이 나오긴 했지만, 월드 베스트 LLM 프로젝트의 경우 구체적인 지원 규모나 사업 방식, 기한 등이 빠져 있다. GPU의 경우도 유상임 과기정통부 장관이 당초 연내 1만5000장, 내년까지 3만장을 구비하겠다고 밝힌 것보다 일정이 다소 늦어졌다. 국내 AI 인재들이 급여가 훨씬 높은 해외 빅테크로 유출되는 현상에 대한 대책도 미흡했다는 평가다. 한 AI 스타트업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AI 역량 강화에 방점을 찍은 것은 긍정적이지만, 글로벌 AI 산업이 성장하는 속도에 비하면 부족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 같은 파격적인 지원안이 잇따라 발표되지 않는 이상 미국, 중국과의 격차는 줄이기 쉽지 않다”고 했다.
☞거대 언어 모델(LLM)
막대한 양의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AI) 언어 모델.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한다. 오픈AI의 GPT, 구글의 제미나이, 메타의 라마 등이 대표적이다. 챗GPT 등 AI 챗봇의 기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