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철원

일본 메모리 반도체 기업 키옥시아가 332단 규모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했다고 20일 밝혔다. 아직 본격 양산이 아닌 시제품을 만든 단계이지만, SK하이닉스(321단)·삼성전자(286단) 등 지금까지 공개된 낸드 제품 중 가장 높은 적층(積層) 규모다. 전원이 꺼져도 정보가 저장되는 낸드플래시는 저장 공간을 아파트처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데, 더 높은 단수를 쌓을수록 고용량 칩을 만들 수 있다.

일본 메모리 기업이 낸드 적층 기술에서 최첨단 제품을 내놓은 것은 삼성이 2012년 도시바를 제치고 낸드 세계 1위가 된 이후 처음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밀려 고전하던 일본 반도체가 모처럼 한국보다 앞선 기술을 보이며 부활의 조짐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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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옥시아가 차세대 낸드를 공개하면서 반도체 업계에선 300단이 넘는 초고층 적층 기술 개발 경쟁이 한층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메모리 기업은 세계 낸드 시장의 60%가량을 석권하고 있지만 미국·중국에 이어 일본까지 빠르게 추격해 오면서 차세대 기술 개발을 서둘러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현재 글로벌 낸드 시장은 삼성전자가 35.2%(지난해 3분기 기준)로 1위이고 SK하이닉스(20.6%), 키옥시아(15.1%), 마이크론(미국·14.2%)이 그 뒤를 잇고 있다.

◇日 정부 보조금 받아 차세대 기술 투자

일본 반도체는 1990년대까지 낸드 시장 최강자였다. 키옥시아의 전신인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가 1987년 세계 최초로 낸드를 상용화했다. 하지만 이 기술을 발판으로 시장을 석권한 것은 한국 업체들이었다. 특히 적층 기술이 고도화되기 시작한 100단 이후부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실상 시장에서 독주하면서 키옥시아는 한 번도 ‘세계 최초’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일본 낸드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밀렸다.

키옥시아는 2017년 경영난에 시달린 도시바에서 분사되고, SK하이닉스가 참여한 해외 컨소시엄에 지분이 매각되는 등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4~5년 전부터 정부 주도로 추진되는 일본 반도체 부흥 프로젝트를 계기로 재기에 나서고 있다. 특히 키옥시아는 지난해 일본 정부로부터 2조원 규모 보조금을 지원받아 미국 웨스턴디지털(WD)과 함께 총 7조원가량을 투자해 낸드 설비를 확장하고 있다. 이번 적층 신기술도 이 같은 차세대 낸드 투자의 결실로 평가된다. 키옥시아는 여러 시도 끝에 지난해 말 상장에 성공하며 미래 기술 투자를 위한 여력도 확보했다.

키옥시아의 332단 낸드는 기술 면에서도 상당한 수준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키옥시아의 332단 낸드는 지난해 7월부터 양산을 시작한 218단 제품과 비교해 데이터 전송 속도가 33%, 단위 면적당 저장 용량은 59% 증가했다. 전력 효율은 10% 개선됐다.

그래픽=이철원

◇미·중 추격도 거세

키옥시아가 낸드 최고층을 선점했지만 기술 개발 이후 본격 양산까지 6개월 이상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당장 시장 판도를 흔들기는 어렵다. 얼마나 빨리 양산 체제를 갖추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키옥시아가 지난해 말 학회에서 332단 기술을 공개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일본 낸드 추격이 예상보다 빠르다”며 “양산에 성공하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폭넓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로선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메모리 강자인 한국 반도체는 일본과 미국, 중국 모두로부터 기술 추격을 받게 됐다. 중국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는 지난달 294단 낸드 양산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가 128단에서 286단 양산으로 넘어가기까지 4년 7개월가량 걸렸는데, 반면 YMTC가 128단에서 294단으로 도약한 기간은 3년 5개월 정도다. 미국 마이크론도 지난 2021년 176단, 2022년에는 232단 제품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등 한국 기업들을 위협하고 있다.

☞키옥시아

메모리 반도체의 일종인 낸드 플래시를 주력으로 하는 일본 반도체 기업. 낸드를 처음 상용화한 일본 도시바의 메모리 사업부가 전신이다. 2017년 도시바 경영난으로 분사, 2019년 현재 사명이 됐다. SK하이닉스가 컨소시엄을 통해 회사 지분을 일부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