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빅테크를 위해 유럽연합(EU)을 상대로 ‘보복 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다. 구글·애플·메타 등이 EU에서 독점·탈세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거나 거액 과징금을 부과받을 상황에 놓이자, “부당한 규제”라며 관세 대응 조치까지 시사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1일 ‘외국의 부당한 벌금과 과징금으로부터 미국 기업과 혁신가 보호’라는 각서에 서명했다. “미국 기업에 피해를 주는 외국 정부의 정책과 관행에 대해 조사하고, 관세 부과 등 대응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도 행정부에 내렸다. 해외에서 빅테크 활동의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그래픽=백형선

트럼프 대통령은 자동차·반도체·철강 등 자국 제조업 육성을 위해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고, 외국 기업에 미국 투자를 압박하는 등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해 왔다. 하지만 미국이 강점을 가진 플랫폼·인공지능(AI)과 관련해선 상대국에 규제의 벽을 허물고 자유무역을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보복 관세라는 ‘통상 정책의 무기’를 전혀 다른 명분으로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빅테크의 자유무역 위한 보복 관세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은 유럽 주요 국가가 시행 중인 ‘디지털세(Digital Service Tax)’다. 글로벌 IT 기업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에서 발생하는 매출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그동안 구글·메타 등 미국의 글로벌 빅테크는 서버와 법인을 세율이 낮은 아일랜드·네덜란드 등에 두고, 세금을 회피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프랑스·영국·스페인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이 빅테크 현지 매출의 2~3%를 디지털세로 부과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정부는 유럽의 디지털시장법(DMA)도 문제 삼고 있다. 지난해 시행된 이 법은 독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기업을 지정해 자사 서비스 우대 같은 행위를 사전에 규제하고, 이를 어길 때는 최대 글로벌 매출의 최대 10%를 과징금으로 매길 수 있다. 대상 기업은 구글·아마존·메타(페이스북 모회사)·MS 등 대부분 미국 빅테크다.

유럽에서 빅테크들은 이런 규제를 적용받고 있다. 구글은 지난해 탈세 혐의로 프랑스 정부의 조사를 받았다. 메타는 반독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유럽에서 약 20억유로(약 3조원)의 벌금을 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빅테크를 위해 동맹인 유럽연합을 상대로 관세 카드까지 꺼낸 것은 미국의 기술 산업 패권을 위해서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인터넷 플랫폼과 AI 분야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구글의 세계 검색 시장 점유율은 89.7%, 메타의 소셜미디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각각 30억명, 20억명의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다. 국가별 AI 경쟁력 척도라 할 수 있는 초거대 AI 모델 보유 수에서 1위 미국은 128개로 4위 프랑스(10개)를 압도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바이든과 달리 자국 내에서도 빅테크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에선 구글을 독점 기업으로 규정하고 일부 사업 강제 매각을 결정했다. 반면 빅테크 출신이 대거 합류한 트럼프 행정부에선 이런 기류가 완전히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주요 빅테크 인물들을 잇따라 면담하고, AI 관련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규제를 대거 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메타 등 빅테크들은 EU 규제와 맞서는 과정에서 전임 바이든 행정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다”며 “지금은 트럼프 행정부가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으며, EU에 더 큰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미·EU, 빅테크 두고 갈등 격화

트럼프의 압박에도 EU는 미국 빅테크를 향한 규제를 당장 풀어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22일 로이터에 따르면, EU집행위원회는 구글이 자사 서비스인 쇼핑·항공권을 검색 결과에 유리하게 노출시켰다며 반독점 혐의로 기소하기로 했다. 구글은 지난해 EU가 이를 문제 삼았을 때 검색 노출 방식을 수정했지만, EU는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빅테크들도 트럼프 대통령을 등에 업고 EU 규제에 대한 반대 강도를 높이고 있다. 구글과 메타의 공공 정책 책임자들은 최근 잇따라 “유럽의 AI 산업이 과도한 규제로 발목 잡혔고 규제가 혁신을 저해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크리스 유 메타 공공정책 책임자는 최근 인터뷰에서 “유럽의 기술 관련 규제는 너무 단편적이거나 지나치다”며 “결국 유럽 시민과 소비자의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디지털세(Digital Service Tax)

글로벌 IT 기업이 서비스 제공국에서 얻는 매출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이다. 대부분 기업은 영업 이익이 발생한 국가에서 세금을 납부하지만, 디지털 기업은 서버 위치와 법인 등록지를 이유로 세금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프랑스·영국 등 일부는 빅테크의 현지 매출 2~3%를 디지털세로 부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