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박상훈

지난해 12월 중국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DDR5 양산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나올 때만 해도 국내에선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미국 규제로 첨단 공정 적용이 어려워 실제 성능 면에서 한국이 월등히 앞선다고 봤기 때문이다. DDR5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주력 D램 제품이다.

하지만 올 들어 중국 시장에 CXMT의 DDR5 제품이 본격 공급되면서 이런 기류는 180도 바뀌었다. 메모리에선 첨단 공정으로 꼽히는 16나노(nm)를 적용한 데다, D램 성능 핵심 척도인 비트밀도(단위면적당 저장 단위)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보다 높게 나왔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비슷한 수준의 기술이라면 정부 보조금을 업은 중국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에서 유리하다”며 “2~3년 전까지 우려하는 수준에 그쳤던 중국 기업들의 한국 메모리 산업 잠식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박상훈

◇중국 공세에 수출 감소

CXMT를 비롯한 중국 메모리 업체들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국 내수 시장 공급량을 크게 늘리면서 한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이 줄고 있다. 지난 1일 정부가 발표한 2월 수출 동향에 따르면,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 수출만 16개월 만에 마이너스가 됐다. 미국으로 향한 반도체 수출은 63.5%, 아세안은 22.2%, 인도는 20.4%씩 증가한 반면, 주요 수출국 중 유일하게 중국만 15.3% 감소한 영향이 크다. 중국을 포함해 모든 국가에 대한 반도체 수출이 늘었던 1년 전과 비교해도 이례적인 상황이다. 중국 저가 D램이 자국 내수 시장에 대거 풀리면서 우리 기업들의 수출 물량이 크게 줄어든 영향이다. 중국은 한국 메모리 수출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중국 내 반도체 자급이 늘면, 한국 기업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CXMT와 양쯔메모리(YMTC) 등 중국 메모리 생산의 절반 이상은 중국 시장에서 팔리는데, 이는 곧바로 삼성·SK 등 한국 기업 실적 감소로 이어진다”며 “지난달 대중 반도체 수출 감소는 중국 때문에 한국이 글로벌 메모리 시장에서 밀리기 시작했다는 확실한 시그널”이라고 말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한국 메모리 반도체 수출 가운데 중국 비율은 몇 년 전만 해도 70%였지만, 최근엔 40% 아래로 떨어졌다”고 했다.

중국 메모리 약진으로 견고하게 유지되던 한국 메모리 점유율도 흔들리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전 세계 D램 시장에서 매출 점유율 39.3%를 기록했다. 2023년 4분기 45.5%에서 지난해 3분기 41.1%로 꾸준히 내려온 데 이어 4분기에도 하락한 것이다. 삼성 점유율이 30%대로 떨어진 건 반도체 불황으로 감산을 단행했던 2023년을 제외하곤 드문 경우다. 반면 중국 메모리의 점유율은 올해 말에 10%대까지 상승할 전망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은 첨단 기술 주도권을 두고 중국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보다 공격적 투자

중국 메모리가 단기간 한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배경엔 공격적인 투자가 있다. CXMT는 2022년 하반기 시작된 반도체 침체에도 불구하고 2023년 생산 설비 투자 규모(61억4300만달러)를 전년 대비 131.9% 늘렸다. 위기 상황에 선제적으로 투자해 경쟁사들을 따돌렸던 한국 반도체 업계의 성공 방식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같은 해 SK하이닉스(-56.5%), 마이크론(-43.9%) 등은 투자를 크게 줄였다.

CXMT는 올해엔 전년 대비 5.3% 증가한 76억8800만달러(약 11조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상당 부분은 한국이 앞서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분야에 쏠릴 전망이다. 반면 삼성·SK는 메모리의 주요 생산 기지인 중국 공장에 대한 투자를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미 반도체법(칩스법)은 중국 내 일부 투자를 허용하고 있지만 트럼프 정부 들어 전면 금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 공장, 쑤저우에 패키징(후공정) 공정을 운영하고 있고, SK하이닉스는 우시와 다롄에 각각 D램·낸드 공장이 있어 트럼프가 칩스법을 수정할 경우 직접 영향권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