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고대역폭 메모리)용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한미반도체는 작년 매출액이 1년 만에 무려 2.5배 늘었다. 자신의 고객사인 SK하이닉스 매출액 증가율(102%)을 뛰어넘었다. 이 회사가 만드는 TC본더는 HBM 제작에 필수 장비인데, 전 세계적으로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HBM용 TC본더 시장이 급격히 커진 덕분이다. 한미반도체의 이 분야 세계 점유율은 70%. 이런 시장을 다른 기업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최근 한화 등 대기업도 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고객사들에 장비를 공급해야 하는 ‘을(乙)들의 전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D램 쌓아올릴 때 쓰는 핵심 장비
AI 반도체에 탑재되는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연산 속도를 높인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다. 적층 과정에서 D램을 일정한 간격으로 쌓고 고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때 열과 압력을 가해 각 D램을 결합시키는 장비가 TC본더다.
한미반도체는 2017년부터 SK하이닉스와 함께 HBM 제조에 쓸 TC본더를 개발했다. 이 시장의 개척자인 셈.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AI 반도체에 사실상 HBM을 독점 공급하게 되면서 한미반도체도 덩달아 HBM용 TC본더 시장에서 지위가 공고해졌다. 덕분에 한미반도체 작년 영업이익은 2554억원으로 1년 만에 639% 증가했다. 삼성전자는 HBM 공법이 달라, HBM 제조에 이 장비를 쓰지는 않는다.
한미반도체는 글로벌 시장 장악력을 더 높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SK하이닉스 이외 다른 업체로 공급선을 넓히는 것이다. 홍콩계 증권사 CLSA는 “한미반도체는 TC본더 매출액 중 74%가 SK하이닉스에서 나오지만 고객사 다변화를 통해 2027년엔 의존도를 40%까지 낮출 것”이라며 “당분간 HBM TC본더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지난해 한미반도체는 일본 신카와의 TC본더를 주로 써오던 마이크론을 고객사로 확보하기도 했다.
JP모건은 HBM용 TC본더의 시장 규모가 2024년 4억6100만달러(약 6700억원)에서 2027년 15억달러(약 2조1800억원)로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화도 최근 HBM용 TC본더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한화 계열사 한화세미텍은 2020년부터 개발하기 시작한 TC본더 기술을 지난 해 상용화 단계까지 끌어 올렸다. 한화세미텍은 지난달 열린 국내 반도체 박람회 세미콘코리아에 처음 참가하며 HBM용 TC본더 기술을 선보였다. ‘3D 스택(Stack)’이라는 자체 기술로 반도체 칩 크기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삼남인 김동선 한화세미텍 부사장이 직접 참가해 “이 시장에선 후발 주자에 속하지만 시장 경쟁력의 핵심은 오직 혁신 기술”이라며 “한화세미텍만의 독보적 기술을 앞세워 빠르게 시장을 넓혀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갑’들도 의존도 낮추기
시장을 잡고 있던 한미반도체와 새롭게 진입한 한화세미텍 간 신경전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한미반도체는 작년 12월 한화세미텍이 자신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와 별개로 한미반도체는 2021년 한화세미텍으로 이직한 전 직원에게 부정경쟁행위금지 소송을 제기해 1심과 2심 모두 승소했다.
한화세미텍 측은 “허위 주장”이라며 맞서고 있고, 한미반도체는 내부적으로 기술 유출 보안을 강화하고 있다.
‘을의 전쟁’이 치열해진다는 것은 SK하이닉스 등 AI 반도체 관련 부품·장비를 납품받는 기업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다. 특정 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가격 협상력에서 불리하고, 시장 변화에도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한화세미텍을 비롯해 싱가포르 반도체 장비 업체 ASMPT에서 TC본더를 공급받기 위해 품질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최신 5세대 HBM(HBM3E) 16단 제품에 ASMPT 장비를 도입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